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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은 붉게 물들고』-텐구의 주제 알기

루뇨 리버 2024. 3. 13. 07:46

왜 아니냐면 옛날에 동갤에 쓴 글이니까 ㅠㅠ

 

근데 왜 올리냐면 그냥 취지가 비슷한 거 같으니까

 

 

 

몇화까지 나왔더라? 정작 인간들의 환상향은 안챙겨봄...

 

 

사실 예전에 동갤에 썼던 내용보다 좀더 고치고 추가한 내용이긴 함

 

 

아무튼 팬픽 리뷰/해설 대회 ㅊㅊ

 

 

 

15화 번역 링크 : https://gall.dcinside.com/touhou/7322855

 

 

 

애니메이션 『빙과』의 원작 소설가인 요네자와 호노부의 추리 소설을 읽다 보면 자주 접할 수 있는 주제 의식이 있다. 그건 사춘기의 인식 재조정이다. 사춘기는 아직 많은 걸 배우는 시기이지만 동시에 미래의 윤곽이 어느 정도는 잡히는 시기이다. 많은 학생이 이때 자신의 장래를 결정하고, 그 결정에서 벗어나더라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자신이 무얼 잘하고 못하는지 다소 뼈저리게 자각하곤 한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설은 이런 장래의 진로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춘기의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자만하거나 잘못 판단하고, 그 후 씁쓸하게도 자신이 얼마나 미숙하고 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요네자와 호노부의 청춘과 자기 인식에 대한 해설이 궁금하다면 그의 소설 『안녕, 요정』에 실린 번역가 권영주님의 해설을 참고해보시라.)
 
자기 인식을 재조정한다는 건,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자신의 주제를 알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무얼 할 수 있는지, 무얼 할 수 없는지 알게 된다. 이런 제약은 개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다양한 환경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사실 개인의 능력보다도, 불공평하지만 다른 환경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집안 사정에 따라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주제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게 되어버린다. 이걸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통 제약을 받지 않는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연못은 붉게 물들고』는 동방 프로젝트에서 텐구 사회를 다룬 2차 창작 만화이다. 텐구는 동방 프로젝트에서 나오는 다양한 요괴 중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위치에 있다. 공식 설정에서부터 텐구는 지극히 사회적인 요괴로 그려지고, 동방풍신록과 같은 본 게임에서도 대사 등을 통해 텐구 사회가 상당히 조직화되어있고, 각각의 텐구에게 주어진 역할이 명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텐구의 대표격 캐릭터인 샤메이마루 아야는 등장인물 가운데서도 손꼽을 정도로 제멋대로에 자유분방한 인상을 주고 있어 아이러니하다. 『연못은 붉게 물들고』도 이런 아이러니를 활용해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텐구 사회라고는 하지만 사실 동방 프로젝트 공식 작품 중 제대로 등장한 텐구 캐릭터는 셋뿐이다.(각각 샤메이마루 아야, 이누바시리 모미지, 히메카이도 하타테.) 공식 설정집인 『동방구문사기』나 『동방구문구수』의 내용과 다른 미디어 믹스에서 다양한 텐구의 존재를 알 수는 있지만 아직까진 곁가지일 뿐이다. 따라서 텐구 사회를 그리면 필연적으로 오리지널 캐릭터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연못은 붉게 물들고』에서도 샤메이마루 아야와 히메카이도 하타테, 이누바시리 모미지 외에도 대텐구, 야마부시 텐구, 어린 백랑 텐구, 시체를 찾는 까마귀 텐구 등 다양한 오리지널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 캐릭터들은 각자의 생각과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에게 하나의 제약 조건이 있는데, 그건 바로 그들이 텐구라는 사실이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지만 거기에 불만이 있는 백랑 텐구-5화
 
『연못은 붉게 물들고』는 이런저런 동방 작품들에서 암시된 것처럼 텐구들에게 각자 주어진 임무와 위치가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샤메이마루 아야와 같은 까마귀 텐구들은 보도와 신문 제작을 맡고 있고, 백랑 텐구는 산의 경비와 호위 등 고된 일을 맡고 있으며 그 위치가 낮은 편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캐릭터들은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를 따르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무언가 불온하다. 텐구들이 각자 맡은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가장 큰 원인은 중간중간 발생하는 텐구 살해 사건이지만, 그 살해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캐릭터들도 중간중간 불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9화에서 샤메이마루 아야에게 덤비고 처참하게 패배하는 어린 백랑 텐구는 그런 불온한 분위기를 가장 먼저 발산하는 캐릭터이다. 어린 백랑 텐구는 감히 까마귀 텐구에게 덤비기는 했지만, 사실 그 외의 일에서는 자기 몫을 다했다. 오히려 백랑 텐구로서 무술 실력을 갈고닦고자 하는 성실한 친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하필 샤메이마루 아야에게 덤볐다가 큰 코가 깨지고, 자신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를 느끼게 되어버린다. 가장 화려하게 자기 인식의 재조정이 이루어진 캐릭터이다.
 
모미지는 어릴 적에 자신있던 장기마저 아야에게 지고 자신의 주제를 깨닫는다.-10화
 
 
현재의 모미지는 일부러 자신의 그릇을 작게 만들고 체념하고 있다.-7화

 

 

그런데 10화에서는 어린 백랑 텐구만이 이런 인식의 재조정이 이루어진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누바시리 모미지도 이런 식으로 자신의 주제를 깨닫게 되어버리는데, 얄궂게도 그 계기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기이다. 백랑 텐구 사이에서 특출한 장기 실력을 갖춘 그녀는 상대가 없어 샤메이마루 아야에게 장기를 두자고 부탁하게 된다. 샤메이마루 아야는 이누바시리 모미지에게 몇 번 지기는 하지만, 대국이 반복되면서 장기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곧 이누바시리 모미지마저 이기게 되어버린다. 이누바시리 모미지에게는 이 일이 큰 계기였는지, 그의 상사가 7화에서 말한 것처럼 재능이 있는데도 자신을 작게 만들어 그릇에 끼워맞추게 된다.
 
허드렛일만 담당하는 백랑텐구만 이런 인식의 조정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재수 없게 여기는 까마귀 텐구조차 비슷한 일을 겪는다. 15화에서 하타테는 자신의 애독자가 보냈다고 믿었던 격려 편지가 사실은 활자로 복제된, 사실 신문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보낸 아무 의미 없는 의례적인 메시지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하타테는 자신이 사실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고, 자신이 쓰는 신문에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하타테는 자신을 격려하는 줄 알았던 편지가 사실은 복제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주제를 깨닫는다.-15화
 
이런 이야기만 두고 보면, 결국 텐구들이 인식의 재조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그 자리에 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다른 캐릭터들은 그렇지 않다. 샤메이마루 아야만큼 『연못은 붉게 물들고』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무명기자 텐구인 타카비야마 에이카이는 겉으로는 까마귀 텐구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고 대텐구의 지시에 따르기는 하지만, 사실은 결계의 밖을 나가 바다를 다시 한번 보고 싶어 하며 이를 위해 동전들을 비밀리에 모아두고 있다. 백랑 텐구들의 코를 꺾어 주제를 알게 해준 샤메이마루 아야조차, 얄미우리만치 까마귀 텐구로서의 역할을 하면서도 사실은 그 이상을 원하고 있다. 그녀는 이제 막 까마귀 텐구로 부활한 어린아이를 위험을 무릅쓰고 보호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인간마저도 자신의 신문의 독자로 만들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작중에서 뚜렷하게 제시되진 않지만, 아마 이 두 까마귀 텐구는 자신이 텐구 사회에서 어떤 주제인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어린 백랑 텐구가 샤메이마루에게 처참하게 깨지고 나서도 불온한 분위기를 털어낼 수 없는 건, 사실 진짜 불온은 자기 주제를 아는 캐릭터들이 자기 주제에 마냥 만족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습지만 샤메이마루 아야는 더 높은 위치에 있지 않고자 하는 게 오히려 사소한 반항이다. 그런데 이건 이누바시리 모미지가 자신의 그릇을 일부러 작게 만들고 간부 시험을 보지 않으려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보면 모미지도 사실은 주제를 알고서 나름의 반항을 하는 셈이다.)

샤메이마루 아야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신문이 남들에게 읽히기를 원한다.-2화

 

오리지널 캐릭터인 타카비야마 에이카이는 남몰래 바깥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2화

 
주제를 안다는 표현은 굉장히 모멸적인 표현이다. 한 사람의 미래의 가능성조차 부정하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그런데 무언가를 극복하려면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제약에 있는지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자신의 목적을 막는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주제를 알고 자기 인식을 재조정하는 건, 지금은 이룰 수 없는 변화를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만 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이는 비단 『연못은 붉게 물들고』의 캐릭터들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에서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일단 인식하고 나서야 거기서 벗어나기를 원하거나, 벗어나고자 이런저런 시도를 하게 된다. 그건 사람이 사회에 속해있고 거기서 텐구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의 역할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사람은 다양한 인생의 단계를 거친다. 그 단계는 보통 어떤 역할을 부여받고 수행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직장을 가지기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학생이지만, 학생조차 그 교육 단계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로 세분화된다. 그리고 이 각각의 단계를 넘어갈 때마다 기존의 익숙했던 역할이 아닌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중학교에서 경험하는 교육과 시험은 초등학교와는 다르고, 고등학교에서는 이제 대학에 들어가거나 다른 진로를 찾기 위해 중학교와는 다른 수준의 교육과 시험을 치를 것을 요구받는다. 존경받는(아니면 재수 없는) 선배였던 3학년 중학생은 어리바리한 1학년 고등학생이 된다. 입시에 지긋지긋해진 고등학교 3학년 선배는 모든 게 새로운 대학교 1학년 신입생이 된다. 이제 대학에서는 고등학교와는 다른 걸 배우면서 자신의 기대가 깨지거나,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원치 않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간신히 취업에 성공하면 또 사회인으로서 자신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그 모든 과정에서 후배가 선배가 되고, 어리바리한 신입생이 취업에 성공할 수 있는 건 어쨌거나 자신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한 번씩은 깨닫고 그걸 계기로 거기서 더 나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동방 프로젝트에서 텐구는 지극히 사회적인 요괴로 그려진다. 샤메이마루 아야라는 캐릭터는 자유분방해 보이는데, 사실 그녀가 속한 사회는 굉장히 위계적이고 경직적이라는 암시가 있다. 『연못은 붉게 물들고』는 이런 아이러니는 잘 활용해 흥미를 자아낸다. 텐구는 사회적인 요괴이고, 이것 자체가 다른 요괴들과는 다른 제약으로 이어진다. 이런 제약은 캐릭터를 좌절시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또 캐릭터가 나름의 동기를 갖게 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연못은 붉게 물들고』가 앞으로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지는 아직 모르지만,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만으로도 텐구 사회가 얼마나 재미있는 서사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작중의 캐릭터들은 인간이 쓸 수 없는 기이한 마술과 움직임을 보이기는 해도, 그들이 겪는 일이 비단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진다. 그건 우리도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보너스
 
작중에 미녹스 리가Minox Riga라는 카메라가 언급되는데, 당연하지만 실제로 있는 카메라이고 작중에서처럼 스파이 용도로 매우 유명한 카메라이다. 더 재미있는 건, 사실 이 카메라가 스파이를 위해 만들어진 카메라도 아니고, 1930년대에 만들어진 카메라라는 사실이다. 처음 생산은 상업적인 용도로 1938년 라트비아에서 시작되었는데, 2차대전 동안 라트비아가 점령되면서 소련과 독일, 다시 소련으로 계속해서 생산자가 바뀌는 기묘한 운명을 겪기도 했다. 전쟁 중에도 이미 그 휴대성 덕분에 참전국들의 스파이를 위한 카메라로 각광받았고, 냉전 시기에는 서독으로 회사를 옮겨 생산이 이어졌는데 서방과 동구권 양쪽에서 첩보 용도로 계속 활용했다고 한다.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touhou&no=7289309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touhou&no=8404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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