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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재현

루뇨 리버 2023. 11. 16. 12:31

 

 

 

 

 

 

Next Dream...?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다른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우리는 늘 우리가 보는 것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궁금해하나, 부질없는 일이다.

사람은 그의 비밀을 감추는 데에 너무 능숙하기에....

 

 

과거 야쿠모 유카리를 사로잡고 있던 의문이 한가지 있었다.

 

‘요괴라는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존재방식부터 존재의의에 이르기까지 요괴의 존재에 대한 의문점은 간단히 해소되는 것이 아니었다.

 

물리적 실체에 기반하지 않은 존재가 요괴뿐만은 아니었다. 인간은 세계의 이치를 신의 섭리로 여겨 세계를 신의 의지로 해석했다. 그러나 신의 존재가 인간으로 하여금 삼라만상의 질서를 표상하고 자연과 소통할 수 있게 한 반면 요괴는 이해할 수 없는 공포로서 온당한 일상에 혼돈을 불러일으킬 따름이었다. 마치 온전한 세상의 조화에 덧칠된 불협화음이 남아 있는 것처럼.

 

또한 대다수의 요괴는 인육을 섭식해야 했다. 본능적으로 경험적으로 인간의 공포가 요괴를 존속시키는 원천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허나 그 공포의 형태가 육과 혈에 결부되는 빈도가 다른 형태의 공포에 비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다는 점이 유카리를 꺼림칙하게 했다.

 

“최근에 카라카사 하나를 만났어. 얼마나 싹싹하던지 인간들하고도 친근하게 지내더라. 걔는 주식이 인간을 깜짝 놀래킬 때의 감정이래. 그런데 걔는 그마저도 구하기 힘들어하던 거 있지.”

 

“츠쿠모가미 부류에게 기대할 게 뭐가 있겠어. 누구도 그를 두고 요괴의 귀감이라고 하지는 않아.”

 

백귀야행의 밤, 어둑한 밤하늘에 휘영청 걸린 달이 비추는 것은 인적 감춘 헤이안쿄의 거리를 제것마냥 먹고 마시고 떠들고 난동 부리며 거니는 요괴의 무리. 그 광란의 행렬이 내려다보이는 지붕에서 유카리를 말동무로 오니 이부키 스이카는 술을 따랐다.

 

“사실 공포의 스펙트럼이라는 건 넓디 넓잖아. 그런데도 대요괴의 부류가 한가지 공포의 출처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느껴지지 않아?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어. 여기 이렇게 상상력이 부족한 불균형은 아무 이유 없이 발생할 리가 없다고. 여기에는 폭로될 금제가 있으리라고. 그러니 바로 여기야말로 분석적 사고를 채택할 지점이라고.”

 

유카리의 열변에 스이카는 흥미를 가지지 못하고 지루하게 여기기만 했다.

 

“분석적 사고라, 전문용어로는 편집증이라고 하던가?”

 

“글쎄, ‘내가 본 것이 고양이였던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는 스키마온나거든. 같은 달 아래에서 이렇게 즐기고 있지만, 달의 마력에 취한 건 나일까 너일까?”

 

“취했으면 집에 돌아가 그리도 좋아하는 잠이나 실컷 자시지?”

 

심드렁한 스이카의 반응에 유카리는 무덤덤하게 일어났다.

 

“엥, 진짜 가냐?”

 

“란이랑 선약을 잡아뒀거든. 더 마시면 정말 취할 거 같아서.”

 

유카리가 상공에 선을 긋자 틈새가 벌어졌다. 양끝이 리본으로 장식된 틈새의 새까만 안쪽은 이곳을 바라보는 안구로 촘촘히 채워져 있었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데 저 눈은 안 나오게 할 수는 없는 거야?”

 

유카리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참 꺼림칙한 능력이라니까.”

 

유카리가 사뿐히 경계를 건너려 할 때 뒤에서 스이카가 외쳤다.

 

“야, 유카리! 다음에는 네가 쏴라.”

 

뒤돌아보지 않고 유카리는 살며시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다음에 보자 스이카.”

 

유카리가 넘어가자 경계는 눈이 감기듯이 지워졌다.

 

눈은 눈을 볼 수 있는가. 거울에 비친 눈은 나를 보는 눈인가. 눈이라는 감각기관 없이 볼 수 없다는 것은 눈을 감으면 알 수 있다. 눈이 있어도 눈에 닿는 시각정보 없이 볼 수 없다는 것은 빛이 모두 차단된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 알 수 있다. 눈은 결코 스스로를 볼 수 없다. 눈 그 자체로는 볼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눈과 그 앞의 대상의 경계에서 본다는 작용이 성립한다. 그 경계를 선명하게 해서 개인을 세계에서 분리해도 그 경계를 흐릿하게 해서 꿈과 현실의 체험이 뒤섞여도 보고 있다는 것은 근저에 그 경계를 두고 있다. 그 경계를 은연 중에 자각하기에 보는 자는 보는 자를 의식하게 된다.

 

“네가 보기엔 어때 란?”

 

“아주 정교한 결계입니다. 이중, 삼중, 그 이상 중첩되고 맞물린 복잡한 결계. 그 범위도 가공할 규모고요. 이만한 결계를 누가 설치할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지만 아무리 비활성화 상태라도 세간에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게 의아하네요.”

 

“그래 일단 빠르게 탐색해봐.”

 

“알겠습니다.”

 

나가노의 밤하늘에 두 요괴가 인기척도 없이 녹아들어있었다. 유카리는 식신 야쿠모 란이 결계를 해석하는 옆에서 상공에 열은 경계에 걸터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 카미시라사와 가주와의 대담을 상기했다.

 

‘무엇을 원하시오?’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아, 가장 성가신 유형이구려. 그대가 헛수고 벌이지 말고 나를 내버려두는 건 어떻겠소.’

 

‘카미시라사와가 아니라면 누가 진실을 보호하겠습니까?’

 

‘그 말대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오. 믿지 못할 수많은 광경을 목격해왔고 발설해서는 안되는 지식을 간직해왔소. 허나 그대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구려. 나는 타인으로부터 진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부터 타인을 보호해온 것이라오. 어떤 진실은 무덤까지 안고 가 재와 티끌로 된 육신을 따라 사라져버리는 편이 나은 까닭으로.’

 

‘진실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죽음조차 진실을 죽이지는 못할 테니까요. 그러니 제가 헛수고를 하고 있다고 할 수만도 없죠.’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아는 듯 얘기하지 마시오.’ 

 

‘이거 한번 보시겠어요?.’

 

‘…아니, 그게 왜 그대한테?’

 

‘등잔 밑이 어둡다지요.’

 

‘허.’

 

‘이 정도면 들을 자격이 되지 않을까요? ’

 

‘나가노로 가보시오. 그 곳에서 그대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오.’

 

그 말대로 심상치 않은 결계가 나가노에 드리워져 있었음은 물론이다.

 

“유카리님, 이 결계의 용량은 대부분 분간, 은폐, 보호 기능에 할애돼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방위 기능은 전무하고 감시 기능도 미진한 수준인데 바로 침투하려고 해도 크게 차질이 없을 정도입니다.”

 

란이 시의적절하게 해석을 끝마치고 결과를 제시했다. 유카리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일어났다.

 

“대요괴 이상만 되도 출입은 어렵지 않네. 그래, 그러면…. 작동하기 전에 미리 들어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유카리는 경계 속에서 우산을 꺼내들어 결계에 정확히 끝을 갖다대었다. 그 상태로 우산을 펴고 반시계방향으로 7번 돌렸다가 쓱 들자 우산에 가려지던 결계 부분에 동그랗게 구멍이 나 있었다.

 

그런데 예고 없이 비단결처럼 고운 옷감이 스르르 날아와 유카리와 란의 팔 한쪽에 휘감겼다. 날개옷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풀거리는 옷에 레트로한 모자를 쓴 여인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아직 손님맞이 준비가 덜 되었으니.”

 

날개옷은 풀어헤치거나 끊어보려 해도 무용지물이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용궁의 사자 나가에 이쿠…”

 

유카리는 날개옷을 떼어내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자마자 즉시 이쿠에게로 엄습했다. 이쿠가 날아오는 탄막을 피하며 날개옷을 위아래로 3번 흔들자 날개옷이 마구 늘어나며 시야를 가리고 진로를 가로막고 몸에 감겨왔다. 이쿠는 신속하게 스텝을 밟으며 전류를 방출했다. 그때 둘이 잠시 마비된 틈을 놓치지 않고 이쿠는 재빠르게 유카리 팔에 묶은 날개옷을 풀더니 란을 완전히 꽁꽁 휘감아 데리고 결계에 난 구멍으로 들어갔다. 간발의 차로 란을 놓친 유카리는 곧바로 뒤를 따라갔다. 

 

“잠깐?”

 

유카리는 그러다가 자신이 들어가기 직전 결계에 난 구멍에 또 다른 경계가 덧씌워졌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아니, 자신의 경계와 유사하면서도 일치하지 않는 통로였다. 지나온 통로를 뒤돌아보니 예상대로 흔적도 없었다. 경계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우주를 유영하는 검은 캡슐 같은 밀실 안이었다. 반대편 창밖에 무채색으로 흩뿌려진 별자리를 조망하는 이가 보였다. 그곳에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창 밖으로 광활한 어둠과 별빛 그리고 지구가 보였다. 우주에 내던져진 것만 같은 텅 빈 원형 라운지에서 중앙에 자리한 모래시계를 닮은 탁상과 마주보게 놓인 등받이 있는 의자 한 쌍이 유일하게 일상감을 주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챙이 긴 하얀 모자를 화려한 금발 머리 위에 쓰고 흰색 블라우스와 자주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뒷짐을 지고 한 손에 부채를 쥔 채 창 밖을 고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왔나요.”

 

그녀가 뒤돌아 유유자적하게 웃으며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유카리에게 우아하게 손을 내밀며 제의했다.

 

“부디 앉으시죠. 한번 대화를 나눠봅시다.”

 

탁상으로 다가서면서도 유카리는 선뜻 그녀의 지시에 응하지 않았다.

 

“란은 어딨지? 여기는 어디고?”

 

“당신의 식신은 털끝 하나 안 상하고 무사하니 안심하세요. 여기는 대충 용궁의 문턱 정도가 알맞겠네요. 아무래도 이 곳보다 더 나은 접선 장소를 물색하기가 어려웠어요. 보안이라든가 문제가 되니까요.”

 

친절한 얼굴에 되돌려줄 건 의심 어린 눈초리뿐이었다.

 

“상대를 함정에 빠뜨려 데려오고는 한가하게 대화를 나누자고. 진심으로? 그게 진의라고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데.”

 

“저는 달의 도시에서 달의 사자의 총책을 역임하고 있는 와타츠키노 토요히메입니다. 또한 저는 당신의 의문에 답할 수 있는 자이기도 하지요, 야쿠모 유카리. 제가 당신을 이 곳에 소환한 이유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모든 것을 말하겠습니다. 당신이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자문한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알아야 하는 내용을 전부 전달하고 나서는 그 후에 제가 당신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때는 당신이 제게 그에 대한 답변을 돌려줘야겠습니다. 제 용건은 그게 전부랍니다. 당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요. 어때요,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겠죠?”

 

태연하게 되받아오는 질문에 유카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이어 의자를 당겨 자리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역시 말이 통하는군요.”

 

“말해봐. 네가 알고 있는 걸.”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야쿠모, 더러움에 대해 아나요?”

 

“더러움이라는 것은 터부야. 불결함을 차별하는 터부. 일체의 생명현상에 오염되는 데서 유래되는 불결함에 대한 터부.”

 

“그건 표층에 불과합니다. 더러움이라는 것은 염마의 심판도 끊지 못하는 지상의 원죄이고 굴레입니다.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에게로 유전하는 더러움에 지상의 생명은 차안에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 죄값을 치르면서도 어리석게도 같은 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미천한 지상의 생명은 그러면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또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생자필멸의 이치에 비통해할 따름이지요. 그 중에서도 지상의 인간은 특별합니다. 지구의 한구석에서 탄생한 인류는 두 발로 걸어 전 세계로 퍼져나가 두 손으로 도구를 자유자재로 쓰고 무리를 짓고 우수한 지능으로 판단하며 재빠르게 지상 최고의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한데 모여 농사를 지으며 정착해 복잡한 사회와 문화를 개발했고 어느새 그들의 문명은 지상의 생물 군집 중에서 손에 꼽히는 지배적인 개체군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도 적응했고 아무리 극심한 역경이라도 극복했으며 아무리 훌륭한 성취에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전진하는 인류, 승리하는 인류, 정복하는 인류로서의 자신들을 증명하는 것이 명백한 운명이라도 되는 것 마냥. 그래서 경쟁자의 시체를 모조리 밟고 올라 만물의 영장을 자칭하게 된 인간들에게 과연 두려운 것이 무엇이 남아있었을까요?”

 

유카리가 묵묵부답이자 토요히메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다시 내었다.

 

“어쨌든 저희 입장에서는 썩 달갑잖은 상황이었습니다. 인간이 먹이사슬 꼭대기의 최상위 포식자로 등극하고도 멈출 기미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달의 도시의 의사결정집단 사이에서는 인류를 보다 문명적으로 개화할 당위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지요. ‘무엇’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관건은 ‘어떻게’였지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알려진 옛 동해보복의 원칙을 들어봤습니까 야쿠모?”

 

유카리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거기서 인간의 두려움을 판별했습니다. 가해자도 반대로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요. 가해자야말로 가해자를 두려워하니까요. 그렇다면 전인류는 과연 무엇을 두려워했겠습니까? 지상의 인간이기에 부득이한 심원한 두려움이 무엇이었을까요? 어리석고 미천한 인간은 먹잇감을 도살하고 가공하고 섭식하며 삶을 영위했고 자연히 그에 불안이 도사렸습니다. 죽을 운명의 인간은 죽음과 더불어 살았고 그들이 쌓아온 더러움만큼 두려움은 깔려갔지요. 만물의 영장을 자칭하던 인간은 밤의 어둠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떨 수 있었습니다. 단지 미지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있어서는 안되는 피식자로의 반전을 말이죠. 그리고 바로 그것이 저희가 한 일이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초기의 핵심적인 공작은 마물이라는 일종의 최적화된 아키타입을 지상에 파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당신도 봤겠지만 저희는 이를 통해 요괴의 공포를 실체화시키고 목적에 부합하는 요괴의 표준, 요괴의 컨센서스를 지상에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요괴가 자리잡기까지 달의 마력이 요괴의 힘의 원천이 될 수 있게 설정했으며 주기적인 개량을 위해…”

 

“달의 도시에서 요괴를 만들었다는 말이군.”

 

유카리가 듣다 말고 말을 끊었다.

 

“네, 언제든지 터질 준비가 된 뇌관에 불을 지폈을 뿐이지만요.”

 

“요괴랑 인간이 유구한 세월 서로 죽고 죽이도록 부추겼다면서 웃음이 나와?”

 

“딱히 다른 방법을 고려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요. 요괴가 인간을 애완동물 삼게 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지상의 인간들끼리도 주인과 노예의 위계가 공고한데 거기에 요괴를 추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저희가 필요했던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공포로 사냥꾼을 위한 사냥꾼이 될 더러움의 극치로서의 요괴이지 다른 무엇도 아니랍니다.”

 

유카리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토요히메는 살짝 서둘러 덧붙였다.

 

“공식적인 입장과는 별개로 적어도 저는 지상에의 개입이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적확하지 못한 현실 진단과 다분히 낙관적이고 나이브한 전망에 기댄 비현실적인 목표였고 오히려 지상이 더욱 더러움이 넘치는 세계가 되어버렸을 뿐이니까요.”

 

혼란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유카리에게 토요히메는 부채를 펼치며 말했다.

 

“앉으세요. 아직 들어야 할 얘기가 남아있습니다.”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질끈 감더니 한숨을 쉬고 유카리는 다시 자리에 앉아 피곤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발 들을만한 얘기였으면 좋겠네.”

 

“일단 들어보세요. 월면개척을 진두지휘한 월인 1세대는 타카마가하라 출신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그를 향한 향수도 남다릅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지상에의 시혜적 개입이야말로 니니기의 후손에 대한 저희의 책무라고 견지했지요. 요괴의 탄생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하지만 카구야 공주의 유배와 야고코로님의 탈주라는 예상치 못한 사건과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전횡, 우사 하치만구 신탁 사건,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실각,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 등 거듭해서 불거지는 지상 위기는 반석 같던 그들의 입지를 위협하기에 이르렀지요. 그런데도 이판사판이었던지 급기야는 지상의 레짐체인지를 부르짖다가 츠쿠요미님마저 그분들에 대한 신임을 저버려서 종국에는 본인들의 레짐체인지로 귀착되었습니다.”

 

토요히메는 부채를 지그시 매만지더니 설명을 이어갔다.

 

“새로운 달의 현자 사구메씨는 소득 없는 지상에의 개입을 지속할 의향이 없답니다. 저를 비롯해 달의 사자는 진작에 지상에 전개한 자산을 회수하거나 청산하는 데 착수해 거의 마무리 단계이고요. 그런데 요괴에 대한 처분이 문제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요괴의 존재가 이미 뿌리내린 지상의 인식체계에 기인하기에 요괴를 청산하고자 한다면 지상의 정화가 수반될 것은 명약관화했기 때문입니다. 못해도 그 옛날 희랍의 신들이 미케네를 멸망시켰듯이 지상의 역사를 말살해야 했겠지만 그러면 그만한 주객전도도 없겠지요.

 

“월인들이 절제의 미덕을 알다니 금시초문이네.”

 

“그런 과중한 부담을 감당하는 건 개인적으로 사양이랍니다. 불필요하게 양자택일의 딜레마에 스스로를 집어넣는 건 미련한 짓이겠지요. 그래서 최선의 대안을 위한 종합솔루션을 구상했습니다. 첫쨰로 두 개의 축을 설정합니다. 달에 순수한 정토를 세웠듯이 지상에도 순수한 예토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달의 마력이 한쪽 극에서 반대쪽 극으로 흘러가게 한 뒤 인과를 역전시켜 예토가 그 자체로 달의 마력과 그로부터 힘을 제공받는 요괴를 끌어들이게 할 것입니다. 둘째로 예토에서 요괴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여과망으로 작용하는 동시에 예토의 영역을 확정짓는 결계를 설치합니다. 요괴는 전부 태생적으로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는 점에 착안한 결계가 활성화된 후 첫째 방법을 통해 요괴가 그 안으로 넘어오기 시작하면 결계는 더 견고해져서 더 많은 요괴를 끌어들이고 그만큼 결계는 더 강화되는 양성 피드백이 발동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요괴를 향한 공포를 처리해야 합니다. 요괴퇴치사의 혈통을 그 안에 집단이주시키고 지상의 인간들에게 음지와 양지의 분별을 보급할 겁니다. 음지를 지양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게 지상의 새로운 도덕률이 되고 요괴에 대한 터부는 터부에 대한 터부로 변모하게 공작할 것입니다. 음지는 옛 지옥 위에 위치하고 이후 독립된 이계가 되면 신규 시비곡직청 지부 역시 배정될 것입니다. 이를 이용해 양지의 영혼이 음지에 두 세대 정도 주기로 대량발생하게 장치합니다. 요괴의 수요와 결계의 여과망으로 요괴에 대한 공포는 원천적으로 소거되고 그리하여 양지에서 요괴는 아무런 중요성을 가지지 않는 옛날이야기 수준으로 격하되고 양지의 인간은 시간의 힘을 빌려 밤의 공포를 망각할 수 있겠지요.”

 

“일을 벌여놓고 뒷감당이 안되니 문제를 안 보이는 데 치워 놓겠다는 거네?”

 

“뒷감당이 안된다기보다는, 저도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거든요.”.

 

토요히메는 유카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는 이 일을 당신이 맡아줬으면 합니다.”

 

유카리는 잠시 방금 들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고심하다가 신음을 내뱉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

 

“저는 당신을 꽤 오래 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제 산과 바다를 연결하는 정도의 능력과 흡사한 능력을 보유한 스키마온나를요. 말했다시피 저희는 요괴를 처분하고 지상에서 가능한 빨리 철수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를 위한 시스템을 마련해뒀다고 해도 이를 관리 감독할 최소한의 인원은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지상에서 후임자를 물색하는 방안으로 가닥이 잡혔고 그에 걸맞는 자질을 지닌 후보자 목록을 간추렸는데 저는 당신이 최적의 후보자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묻겠습니다, 달의 사자의 지상 부문 최고위 협력자 지위를 승낙하고 지상의 전권을 위임 받겠습니까? 그리고 저희가 준비한 토지를 인수받아 모든 괴이와 신비를 끌어들이는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게 하여 카미카쿠시의 주범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겠습니까?”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유카리는 어이가 없는 마음을 담아 한마디 했다.

 

“질문 하나만 한다며?”

 

“아, 두번째는 못 들은 걸로 쳐줘요.”

 

가능하면 첫번째 질문도 못 들은 셈 치고 싶었지만 상대는 어물쩡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유카리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굴리게 한 장본인은 느긋하게 웃다가 첨언했다.

 

“저희가 지상에서 철수했다고 해서 지상에 절대 간섭하면 안되는 건 아니에요. 필요하면 요청대로 비공식적인 지원을 붙여줄 수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이겠지만요. 아,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나누는 대화는 남김 없이 오프 더 레코드로,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겠죠?”

 

토요히메는 한손을 쉿 입에 댔다. 극심한 피곤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유카리는 불쑥 한마디 내뱉었다.

 

“당신이 나 따위를 겁박해 윗선으로 모시기를 강요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네.”

 

“강요보다 훨씬 합리적이지요. 이건 계약입니다. 그걸로 성에 안 차면 밀실 안의 신성동맹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고요. 잘 생각해보세요. 당신이 제 주문을 성공리에 이행하여 거친 세상의 아름다운 감옥을 완성한다면, 당신과 당신의 토지의 안전이 곧 제 이익이 될 터입니다. 당신은 충분히 현명하잖아요? 그렇지 않았으면 제가 협력자로 선정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생각해봐요 야쿠모, 저는 당신이 알고자 하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고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이게 당신이 원하던 것 아닙니까? 현실을 인지하게 해주는 게 강요라고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이 자리에 앉지 말았어야죠. 여기서 도망칠 방법이 있으리라 믿는다면 궁리해보세요. 저는 당신에게 대답을 재촉하지 않겠습니다. 필요한 만큼 시간을 쓰세요. 저는 언제까지고 이 자리에서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테니까요.”

 

“…”

 

“아, 굳이 더 기다릴 필요도 없겠네요. 아주 좋습니다. 말할 것은 다 말한 것 같군요. 그럼 어디 한번 대답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월면전쟁의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월면에서 귀환했다는 유일한 생존자 야쿠모 유카리의 이름도 삽시간에 사방팔방으로 전해졌다. 처음에는 악명에 가까운 명성이었지만 점차 기묘한 평가가 더해져갔다. 수수께끼 같은 언동, 난해한 사고방식, 기상천외한 능력, 정체불명의 배경, 드러나는 것 이상의 실력까지 야쿠모 유카리는 분명 잊기 어려운 요괴였다. 누군가는 그녀를 두려워했고, 누군가는 그녀를 신기해했고, 누군가는 그녀를 기꺼워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그들이 그녀를 믿었다는 것이다.

 

저녁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자 만월이 그 자태를 푸르스름하게 드러냈다. 쌀쌀한 바람이 하쿠레이 신사 경내의 등불을 휘젓고 그에 따라 땅에 덧칠된 그림자들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참석자들 일부는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았지만 거의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나머지는 조용히 기다리던 와중에 한두명씩 고개가 신사의 지붕으로 돌렸다. 상공에 뚫린 경계, 모두가 기다리던 이가 도착했다. 유카리는 지체 없이 경계 밖으로 나오더니 사뿐히 다른 이들 앞에 착지했다. 그리고 모인 면면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창립자 여러분의 노고에 힘입어 ‘요괴확장계획’은 바야흐로 대단원에 다다랐습니다. ‘환상향’의 여명이 머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 세계를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구축하겠으며 기존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시대의 개창을 기리게 되었습니다. ‘결계’ ‘무녀’ ‘현자’, 환상향을 지탱할 세 개의 기둥. 금후로 창립자 여러분은 새로운 환상향의 현자에 선임될 것입니다. 앞으로 환상향의 미래를 결정하고, 결계를 온전하게 지키고, 무녀를 보좌하는 사명이 여러분 앞에 주어졌습니다. 지난날 이 중 몇 명이 제게 도대체 바라는 게 무엇이냐고 따져 묻던 날 기억하십니까? 그때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여러분이 언젠가 화창한 날씨와 생기 넘치는 풍광과 활기찬 인요를 지나치며 환상향을 거닐고 있다가 문득 멈춰서서 홀연히 ‘멈추어라. 너는 정말로 아름답구나.’라고 읊조리는 순간을 고대하고 있다고.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창립자, 현자 여러분 각자가 환상향에 대한 나름의 믿음이, 희망이 있기에 여기까지 함께 따라와주셨겠지만 현실은 언제나 상상조차 추월하곤 합니다. 우리의 환상향 앞에는 무궁무진한 가능성만이 놓여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미래를 위해, 우리의 최후의 보루를 지키기 위해,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위해,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하도록 합시다. 용신께 맹세코.”

 

 

 

 

 

 

 

 

Special thanks:

그리고 정말 시간은 있겠지

창유리에 등을 비비고

거리를 따라 미끄러지듯 가는 노란 안개에게;

시간은 있겠지, 암 있고말고,

네가 만날 얼굴들을 만나기 위해 얼굴을 꾸밀;

사람을 죽이고 애를 배게 할 시간이,

문제를 들어 네 접시에 놓을

손의 일과와 세시(歲時)에게도;

너를 위해서도 시간, 나를 위해서도 시간이 있겠지,

아직 백 번은 망설일 시간이,

백 번 보고 또다시 볼 시간이,

토스트 곁들인 차를 마시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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