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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의 다리

루뇨 리버 2023. 11. 16. 16:59

“말세로다!”

 

“...”

 

“요즘 들어 날씨는 왜 이리 변덕인지. 가을 한 철 기다리기도 버겁게 쏟아지는 장대비 하며, 과객 빌려주던 방들은 왜 그리 좁아지고 누추해졌으며, 참 비를 피하기도 딱한 나무에서 등짐 맨 떠돌이끼리 마주 대고 할 말도 없지.”

 

“한 시진 동안 혼자 떠든 건 그쪽이었다만.”

 

“형씨, 그나저나 짐이 많네그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

 

“...많은 건 둘째치고 할 말이 있다.”

 

“아 참. 뱁새 기웃거리는 논가에선, 나무 하나 두르고도 반이 남을 숭헌 구렁이가 나왔지 않던가? 서리꾼이 은인으로 둔갑하다니 거참 너구리도 비웃을 일이야. 딸을 구해줬다며 장차 사우로 들이려나? 만석꾼 고래등 집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뒤집히려나?”

 

“...”

 

“아니지! 장차 화를 피하긴 글렀지. 너구리 한철이라고 참말로 우습게 보이더냐? 조만간 광 안이 이파리로 가득가득이고 눈물은 펑펑 흐르겠지. 홋훗호, 보기 좋다마는,”

 

“사도의 후타츠이와. 맞지?”

 

“으음? 어이구?”

 

“널 찾으러 왔다.”

 

“어이쿠야. 지금 보니 형씨가 형씨가 아니라 여시였군. 미안허이. 그 범상치 않은 뽐새, 꼬랑지는 몇인가? 대여섯은 되나? 구미호가 순순히 꼭두각시마냥 식(式)이 될 리는 없을 터인데...”

 

“너...! 아니, 됐다. 주군의 전언이니까 일단 받기나 해라.”

 

“기다려 보래두! 근데 여시, 여시는 불평하는 걸 봐도 조금만 머리 굴리면 똑 부러지는 여시일 것 같으이. 그러니 참말로 거시기해서 알기 어려운 한 가지 이야깃거리나 전해 주지. 사건의 진상을 지대로 추리해 내면 내 지장이고 뭐고 그 종이에 베껴서 돌아가도 되네. 차용증은 말고, 홋훗호, 우리 아덜이 태워주는 진흙배 타기 싫으면.”

 

“헛소리. 거절할 거면 미리 하던가.”

 

“빳빳한 고개로 헛소리 집어치우라 말라, 일단 접어두고 듣고 나서 답해보시게나. 그짝은 일야교(一夜橋)의 바닥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계시던가?”

 

“유카리 님의 명을 받들며 사방 천지를 훑고 다녀도 그런 다리는 못 들어봤다.”

 

“일야교라는 건, 이제 알겠지만, 요 앞의 작은 마을께에 걸친 하룻밤의 다리일세. 그리고 알면 알수록 참말로 하룻밤의 다리지.”

 

“쓰잘데기없을 정도로 통속적이군.”

 

“그렇지! 거시기한 일을 왜 하필 다리에서 할까? 인간이 짐승만도 못해져서 보도씨 바라마지않던 요괴님네 세상이 오나, 이것도 아니여. 속 깊고도 딱한 사정이 있으이. 일야교의 진짜 의미는 야음을 틈타서 파렴치한이 출몰하는 다리가 아닐세.”

 

“...그럼 뭐지?”

 

“무서운 하시히메가 사시사철 출몰하더니 일 년에 하짓날 딱 하룻밤 사라지는 다리가 바로 일야교라네. 고삐 풀린 망아지가 마구 날뛰다가도 멈추는 무서운 저주의 근원이 딱 하룻밤 멈춘다! 이것이 바로 일야교. 하지만 몇 년이고 저주가 남아돌면서 일야교가 일야교 노릇을 못 하고 있지. 어떻게 된 일일까? 여시는 감이 오나?

 

“이상하군.”

 

“벌써 감 잡았나?”

 

“하시히메는 다리에 맺힌 연심과 질투와 증오가 결정화한 존재다. 질투할 상대가 아예 사라지지 않는 한 하시히메도 결코 사라지지 않아. 아니, 때가 온다고 한들 더는 질투할 수 없게 되었다며 폐허를 온통 녹색 원기로 물들이는 지독한 존재지. 그런 하시히메가, 하루 동안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고?”

 

“워메, 역시 식은 식인가, 쿡 찌르자마자 청산유수로 줄줄 늘어놓으니께 무서워라. 과연 하시히메란 전설대로 순순히 사라져 주는 놈이 아니여. 증좌는 산더미인데 재현할 수도 없고 난처하구만.”

 

“재현한다니? 뭔 수로?”

 

“하지만 그렇기에 이 문제가 성립하는 거지! 우리 너구리 아덜 중에서도 그 전설을 따라 해 보려고 몇 번 도전해 본 놈들이 있는데, 철없는 멍청이나 다름없이 홀려서는 죄다 강바닥에 꼴까닥했지. 반장 반장 시모노장일세.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자업자득이지... 그런데, 익사라고?”

 

“그려. 여름철 불어난 강물에 익사했지.”

 

“하시히메를 만나면 주로 주살(呪殺)을 당할 텐데. 여기 하시히메는 좀 특이한걸.”

 

“아참, 혹시 전해지는 대로 하짓날이 아니었을까 봐 몇몇이 또 가부렀는데...”

 

“그 너구리들. 네가 꼬드겨서 보낸 거지?”

 

“호호, 젊어서 멍청해야지 늙어서도 멍청하면 추한 꼴이여. 결과는, 참말로 다양하게 나자빠진 너구리 백귀야행이었다네. 익사, 변사, 폭사, 아사, 교살, 참살, 주살, 학살, 시체, 동태, 실성, 심지어는 피탄까지. 주살이 말이 주살이지, 저주란 건 여시도 알다시피 그리 깔끔하지 않어.”

 

“그런데 여름철에는 항상 익사라고 한다면...”

 

“하시히메도 아무렴 때에 따라 가장 쉬운 방법을 선호하것지. 나 원 참, 하짓날만 다가오면 비쩍 마른강이 갑자기 불어서 다리만 건재하고 도저히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어, 전설을 찾아서 배 띄워가지고 가면 뭐하나? 다 강물에 처박혀서 만수무강이로세.”

 

“배라면 어디에 있지? 보여줄 수 있을까?”

 

“그래, 저기 많이도 뭍에 박혀서 삐걱거리는 쪽배처럼,”

 

“...! 배다리다!”

 

“뭣이? 배다리?”

 

“이 마을에 배다리가 언제 마지막으로 섰는지 알고 있나? 아마 이 마을이 고기를 잡지 못하게 된 시점이랑, 일야교가 전설로 남은 때와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대체?!”

 

“아마 정답이겠지. 네 말처럼 지장이고 뭐고 받아가도록 하마.”

 

“잠깐 잠깐 잠깐!! 배다리가 일야교 전설과 뭔 연관이 있단 말인가? 하시히메는 왜 나오지 않았냐는 말이야!”

 

“흥. 한 일족의 두령이 보기보단 생각이 짧았군.”

 

“!”

 

“미생지신(尾生之信)이란 말은 알고 있겠지?”

 

“아니. 처음이여.”

 

“춘추 시대에 미생이란 청년이 다리 밑에서 오지 않는 연인을 기다리다가 불어난 강물에 익사하고 말았지. 불어난 강물. 이 강에서 범람원이 넓고 유량을 크게 웃도는 강수량이 하지마다 나타난다면...”

 

“아니 아니, 여시만 알아듣는 이야기만 하지 말고 좀 친절하게 가르쳐 주게나.”

 

“이곳의 하시히메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 바로 미생지신이다, 후타츠이와. 하시히메는 흔히 녹안의 파사국 소녀로 비유되곤 하니까 청년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어. 남자와 서로 도피를 결심했던 양갓집 규수가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가 강물에 삼켜졌다면, 이 지역의 거친 물살이 여인의 원한과 동일시됨도 당연하지.”

 

“그런가!! 그래서 하짓날에는 꼭 익사를?”

 

“하지만 이 마을은 농지가 적어서 단 일주일도 고립되어 살아갈 수가 없는 구조다. 주민들이 배다리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야. 기존의 원한을 품은 다리는 부숴지게 놔두고 하시히메의 원한을 달래는 새로운 다리를 만든다. 하짓날마다 이뤄지는 훌륭한 해주 의식이나 다름없어.”

 

“...그러면 전설도 납득이 가네. 오호라, 그럼 십수 년 전부터 배다리가 사라진 건.”

 

“짚이는 곳이 있나?”

 

“실은 친한 촌로(村老) 중 하나가 이 마을이 쇠락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해줬네. 똑같이 십수 년 전에서 얼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일이야.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하지 않았나? 그땐 그 반대로였어. 하늘은 어두워지고 화산재를 실은 토사가 해룡마저 한입에 집어삼킬 기세로 무섭게 쓸려내려 왔지!”

 

“마을은 어떻게 되었지?”

 

“여까지 왔을 땐 참말로 기적이 일어나서 검은 빗줄기를 맞으며 얼싸안고 기뻐했지. 하지만 진정한 마수는 바로 다음에 뻗쳐왔네. 마을을 옥죄고 틀어쥐면서도 한편으론 젖줄이나 마찬가지였던 물길이 바뀐 게야. 뻘밭에 처박힌 저 쪽배를 보았나?”

 

“진짜군. 저래선 배를 띄울 수도 없을 정도야...”

 

“또 아예 못 살라는 법은 없는지 저 뻘로 농사를 짓고 있다는 건 아나? 그나저나 마을에서 살기 위해 놓던 배다리가 곧 해주의 의식이기도 했다면 다리를 놓을 이유가 사라진 지금은 하시히메의 원을 풀 장소도 사라진 셈이지. 참말로 대단해, 여시도 다시 봤어, 괜히 아홉 꼬리가 드문 게 아닌 듯해.”

 

“어떠냐, 후타츠이와?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려, 고마워라. 임자 덕에 고놈을 도로 가라앉힐 술수가 퍼뜩 생각났으이.”

 

“뭐?”

 

“강이 불어난다는 거, 여시도 알 만큼 조정의 높으신 양반도 가라앉혔거든. 아참, 연호가 바뀌었구만. 그때는 요시노 조정의 시대였나. 암튼 쌈박질 중에 대단한 분이 가라앉았던데. 그래가지고 저 다리 밑에 잠겨 있는 보물이 말이여, 참말로 국보급잉게. 내가 뭔 일도 없이 노망이 나가지고 우리 귀중한 동족을 하시히메의 아가리에 집어넣었을라나?”

 

“...!”

 

“걱정 말게. 보답은 느그 주인이 원하는 이걸로 솔찬히 해줄 터이니 화내지 말어. 여시가 알려주기 전에는 정말로 몰랐으니께.”

 

“기분 나쁘게 할 작정이면 소용없다. 후타츠이와.”

 

“그려, 안 그래도 우리 아덜이 여시 냄새 맡고 화나서 배 뚜들기려는 거 막고 있으려니 좀이 쑤시드만. 만약에 여시 이름을 걸고 십변화 승부하고 싶어지면 거 수상쩍은 틈새요괴 부적이나 붙이고 오지 말드라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이걸 떼고 짐승같이 싸우라니.”

 

“천천히 생각혀. 그럼 조심히 들어가게! 홋훗홋훗호.”

 

“하아... 너구리 같은 자식. 아니, 너구리인가.”

 

 

 

[란? 이야기는 잘 끝났어?]

 

“유카리 님? 어쨌건 임무는 완수했습니다. 그만 돌아가지요.”

 

[먼 거리에서 수고했어. 너구리랑은 상성도 안 좋을 텐데.]

 

“상성을 따지고 말고도 없었습니다. 뭐, 잠깐 그리운 시절 생각도 났고요.”

 

[뭐? 란?!? 그리운 시절이라니?]

 

 

“나쁘지 않잖아요. 여우랑 너구리랑 승부하는 풍경도.”

 

[란?! 설마 지금 버그난 거니?? 라아아아아아아아아안!!!!!]

 

“하지만 저는 언제까지나 당신의 식이랍니다.”

 

[놀랐잖니. 이래서 원격 조작이 힘들다니까.]

 

 

 

가을 하늘, 틈새요괴의 비명 같은 호들갑이 울려퍼졌다.

 

여우 요괴의 모자가 흘러내리면서 귀가 보이려다 도로 감추어졌다.

 

이번 일야교는 아마 여우가 굴로 돌아가는 이듬해 하지에 서리라.

 

그 전까지 얼마나 많은 아그들이 톱질하고 배를 몰지는 또 모르는 일이었다.

 

어허라, 배를 몰아라, 수신님 노하시기 전에 퍼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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