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아카이브
저주받지 않았다 본문
오늘은 내게 남아있는 날 중 가장 추운 날일거야.
그 말인 즉슨 인생 그래프에서 우상향할 일만 남았다는 뜻이지.
그녀는 스스로를 고무하며
입에 머금은 홍차를 마저 삼켰다.
달큰한 홍차의 맛은
위장을 상냥히 쓰다듬는 것으로
미래에 대한 장및빛 공상에
물성을 부여한다.
상처투성이인 지난 밤의 기억이
당분에 가라앉는다.
나는 지극히 냉정하기에
그날 밤의 일이
내 잘못임을 안다.
언젠간 그녀에게 사과해야 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보란 듯이 성공해서 몇배로 보답할 생각이다.
그리고 날 깔봤던 사람들.
특히 그년은,
온실속의 화초라느니, 의지박약이라느니 헐뜯던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다.
이곳 재계의 큰 손이 되어서
내 발가락을 햝지 않고서는 못배기게 괴롭힐 거거든.
알몸 도게자하는 그년의 모습을
뱃살 주름 하나 단위로 상상하니
홍차는 이미 바닥나 있다.
이런, 너무 몰입했나.
이만 일어나야 겠어.
그런데 저 고양이는 뭐지?
애완동물 관리는 좀 제대로 해주지.
뭐? 소크라테스? 고양이 이름이야? 저게?
어라, 이리로 달려오네.
같이 달려오는 쟤는… 주인인가?
푹신푹신하게 생겼네.
보통사람이라면 당황해서 부딫치겠지만,
얍,
수유를 다루는 입장에서
나노세컨드 단위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지.
응? 머리카락이 그새 곤두섰네. 정전긴가?
살짝 스쳐도 저 정도라니 거의 스파크 수준인걸.
허벅지가 뜨거운데…
응?
옷에 이 부적… 그 년이잖아. 폭발하는 그거.
저번에 싸우다 붙었나 보네.
근데 왜… 활성화 상태지?
스파크? 설마? 뇌관처럼?
그 정도라고? 정전기가?
아니 잠깐만
잠깐
어어어어어…! 터진...
침이 목구멍에서 끓어 수증기로 변하는 감각을 느끼며
그녀의 정신은 아득해지고 말았다.
…
잠시 들른 카페에서 알 수 없는 인체발화 사건을 겪은 관계로
경찰과의 몇시간동안의 증언을 마치고
기진맥진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한 엘렌은
그녀의 가게 현관에서 총 세번을 놀랐다.
첫째, 왠 괴한이 현관앞에서 야차같은 얼굴로 서 있었고.
둘째, 괴한은 알몸이었으며,
셋째, 다짜고짜 보상하라며 멱살을 잡았기 때문이다.
사태를 파악한 엘렌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외쳤다.
"노출증 변태 강도야!"
"너 때문이야!" 괴한은 받아쳤다.
"근데 쓸데없이 예뻐!" 엘렌은 좀 더 곰곰히 살핀 후 외쳤다.
"어머! 고마워 죽겠다!"
엘렌의 멱살을 잡은 채
주머니를 터는 와중에도 인사를 잊지 않는다.
의외로 예의가 바른 거 아닐까.
그렇다면 뭔가 오해가 있는 거 아닐까.
"일단 대화를 해봐요! 그리고 지갑엔 보호마법이 걸여있어서 제가 아닌 사람이 열면…"
"꺄아아아악!"
많이 아프다구요.
…
오늘은 새벽까지 일기를 써야겠어.
괴한의 말을 들으며 엘렌은 밤이 길어질 것을 직감했다.
"그러니까… 낮의 그 자폭녀가… 괴한님?"
"자폭이 아니라구! 네 머리의 정전기가 스파크를 일으켜서 폭발 부적에..!"
"그런데 폭발 부적은 왜 붙이고 있던 거래요?"
"내가 붙인 거 아냐! 그년하고 대판 붙다… 아무튼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알아야 될 건 말이야.
너 덕택에 내 독립자금이 다 타버렸고,
넌 거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이지."
"그치만… 고의도 아니고,
가해행위와 손괴발생 사이의 인과가 약한 행위에 대해서는
민사적 책임을 지우지 않는게 일반적인걸.."
"..."
예상치 못한 엘렌의 논리적인 반박에 말문이 막혀
괴한은 검은 눈동자를 두어번 끔뻑였다.
"그럼… 난 어떡해? 이젠 한 푼도 없는데?"
어쩐지 울먹이는 목소리다.
"집은 없어? 고아야?"
순진한 표정에 반해 내용은 꽤 맵다.
괴한은 고개를 젓는다.
"그건 아니지만… 돌아갈 순 없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엘렌에게
괴한은 자신의 원래 계획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응, 어디서 들어봤는데? 이 얘기
가만히 듣던 엘렌은
기억의 실을 끄집어내는 듯
눈가를 찡그리다가
마침내 생각이 난 듯
손뼉을 짝, 쳤다.
"혹시 네가 '타케노코'니? 맞아?"
…
타케노코란, 닉네임이다.
정확히는, 매주 수요일,
영나암에 위치한 사설 스튜디오에서 송출되는
환상향 최고의 라디오 프로그램
고민상담 프로그램의 98회 세번째 사연자의 닉네임이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근데 자꾸만 미루게 돼요.
먹고사는 데 지장없는 집에서 살았고,
보호자도 취업에 관대한 입장을 취했지만
마냥 놀고만 있다보니
그녀의 불안은 그런 믿음과 사랑을 먹고 쑥쑥 자랐다.
나는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
보호자들이 코가 잘못꿰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닌가
부담감은 다리를 옭아맸고
그것을 이유로 그녀는 문지방 앞에 주저앉았다.
자괴감을 베개로, 불안을 이불로 삼고 잠드는 밤이
계속되고 있다고,
그녀는 썼다.
"자신을 믿고, 과감하게 나아가는 거에요."
거기에 대한 방송의 DJ,
애청자 사이에서 여신님으로 불리우는 여인의
청아한 목소리는
고운 비단으로 쌓인 채
눈꽃처럼 콧잔등에 내려앉는 듯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이에요.
지금 사연자님이 그런 상황에 처한 것을
온전히 사연자님의 잘못으로 볼 수 없어요.
사연자님을 그렇게 만든 환경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세요.
부모던, 친척이던, 얼마나 소중하던
지금은 그들과 작별할 때에요.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세요.
힘들고 고된 길이겠지요.
하지만, 모험은 흔적을 남기죠.
그것을 증표로
찾을 수 있을 거에요.
행복 말이에요."
내용은 둘째 치더라도
너무나도 황홀한 여신님의 목소리는
온화한 설득력이 있었다.
부외자인 엘렌마저도
콧잔등이 시큰해진 마당에,
당사자는 오죽했을까.
아마 코뼈가 부러질 정도로 감동받았겠지.
"그래서… 여신님 말대로 독립해버린 거야?"
"맞아."
"근데… 네가 그런걸 어떻게 알아? 너도 혹시,"
"물론! 광팬이지! 너가 폭발한 그 날에도
협찬건으로 영나암을 찾아갔었거든!
여신님 얼굴도 한 번 몰래 볼 겸 해서.
뭐, 둘다 실패했지만."
엘렌은 그러곤
독돈이 올라 소상공인의 협찬은 상대도 안해주는
영나암의 모토오리 PD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자기도 사무실 하나 없어서 부모님 서점 2층에서 방송하는 신세에
거렁뱅이라니, 너무 한 거 아냐?
한 번 지네 서점이 불타야 정신차리지.
그렇긴해도 이해가 안 가는건 아냐.
고민상담이라는게 익명성이 중요하니까.
여신님의 정체가 밝혀져 버리면 의의가 사라져 버리겠지."
"그런 고민은 부스러기 팬들이나 하는 거지.
이나바의 1년 생활비만큼의 금액을
후원금으로 바친 나에게는
얼굴따윈 사소한 일이란다?"
"어라라, 백수라며, 그래도 되는거야?"
"백수도 쓸 땐 써야 하는거야."
그거 네 지갑 아니잖아.
반박이 떠올랐지만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다만, 가출하기 전의 그녀의 모습이
사연에서 말한것과 차이가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실은 쫓겨난 거 아냐?
이러니저러니해도
같은 관심사를 공유한 덕택에
어느 새 둘의 거리는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또한 기이하게도,
둘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친밀감을
어렴풋이 인식했다.
마치 타지에서 동향사람을 만난 듯한,
동질감에서 우러나오는 친숙함이었다.
그런 연유로
어느 새 코타츠에 기어들어간 그녀가
탁자에 뺨을 기대고 앉아 있었음에도
엘렌은 제지할 생각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런데, 너도 사연 보냈니?"
"엄청 많이 보냈다구!
'푹신소녀'라고 알려나?"
"으엑, 그 짝사랑 빌런이 너였어?"
이번에는 엘렌 쪽에서 볼멘 소리가 나올 차례였다.
그렇게 대화는 이어졌다.
하쿠레이 신사 아래의 작은 도구점에선
새벽이 되고 닭이 울때까지
호롱불의 잔영이 멎지 않았다.
…
밤을 새운 토론의 결과로 결정된
낮에 일어난 불행한 사고,
일명 '인체발화 사태에 대한 조정안'은
다음과 같았다.
하나, 을은 갑의 실업에 책임이 있으므로
갑의 취업까지 의식주를 제공해 줄 것.
둘, 갑은 그에 대한 대가로 을의 가게에 노동력을 제공할 것.
셋, 갑은 또한 대가로, 을에게 '초특급 연애 솔루션'을 제공할 것.
이상.
테이블에 펼쳐진 조정안을 보는 표정은 사뭇 달랐다.
득의양양한 표정의 그녀와 달리
엘렌은 미심쩍은 구석을 곱씹는 듯 밋밋한 표정이다.
"그래서, 제공하겠다는 연애 솔루션이란게 뭔데?"
그녀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쓱 훑으며
한껏 폼을 잡는다.
"있잖아,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두근두근...콩닥콩닥… 뭐 그런 거?"
엘렌의 대답에
훗, 코웃음을 치곤
만지작 거리던 귤을 위로 던진다.
엘렌은 무심코 떨어지는 귤을 바라본다.
"사랑이란 말이지,"
귤이 떨어진다.
떨어지고 떨어져서
바닥에 닿겠지 싶은데도
낙하운동을 멈추지 않는다.
바라본다.
오랫동안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 사물 하나를.
영원만큼 긴 순간에서 낙하하는 작은 물체를
엘렌은 본다.
끝이 시들어가는 이파리 하나가,
그 아래로 이어지는 굴곡진 윤곽이 보이고
윤곽은 곧 귤 색으로,
생기있게 부풀어오른 껍질으로,
반사광이 옻칠한 윤기로 채워진다.
나는 저것을 원한다.
엘렌은 무심코 그렇게 확신한다.
손을 뻗는다.
낙하지점 아래로 뻗는다.
떨어지는 귤이 손 끝에 닿는...
"타이밍의 곡예다, 이거지."
텁, 순식간에 움직인 그녀의 손이
엘렌 눈 앞에 있던 귤을 낚아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상대가
말을 맺지 못한 틈을 타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말을 잇는다.
"사랑이란 건 찰나에 발생하는 스파크고,
불꽃은 오래 지속될수록 강력해져."
첫 인상이 끝까지 간다는,
오래 보아야 정이 든다는,
관계의 법칙은
사랑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는다.
"내 능력은 그 순간을 영원으로 늘릴 수 있어.
무한만큼 지속되는 스파크를 만들어 내는 거지.
즉! 네가 방금 귤한테 느낀게,
일종의 사랑이란 얘기야.
그리고 나는 맘만 먹는다면
이 순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란 말씀!"
냠,
그녀가 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아직까지도 달떠있던 엘렌은
우물거리는 뺨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걸 쓰면 내가 귤이 된다는 거지?"
"정확해. 어떤 남자도 넘어가지 않고는 못 배길 걸?"
굉장해~ 감탄을 연발하는 엘렌을 상대로
콧대가 높아져가던 그녀였지만,
근데 왜 취직은 못하냐는 엘렌의 기습 질문에
무심코 먹던 귤을 기도로 삼켰다.
코로 엄습하는 알싸한 고통에
그녀의 대답은
한참을 뒹군 후에나 나왔다.
"할려면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내 능력이 한거지
'내가' 한 게 아니잖아.
난 나 자신으로 꿈을 이룰거야.
다른 사람의 바람이나 배경에 기대는
텅 빈 인생은 질색이라고."
그치만 그게 그거 아닌지?
엘렌은 의아했지만 말로 꺼내진 않았다.
빨개진 눈가에서
망막의 해변에서 찰랑거리는
옅은 울음의 징조를 감지한 탓이었다.
단지 기도로 과즙을 삼켜서일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렇게 엘렌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면~ 계약 성립이네."
"넌 연애, 난 취직. 이루고 나가자꾸나. 원하는 바를."
손이 손을 맞잡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 해가 떠올랐다.
새로운 인연,
새로운 목표,
새로운 일상의 첫 날을
그들은 밤새 떠들던 피로에
골아떨어진 채로 맞이했다.
올빼미 생활을 하던 그녀에게는,
아이러니 하게도 이것만은 꽤 익숙한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사고가 있어서,
새로운 날이 하루 미뤄졌지만,
오늘부터 진짜 시작이야.
내 인생에서 가장 저점의 날은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그녀는 잠이 들기 전 그렇게 결심한다.
하지만 자기 전에 하는 결심이란
찬란하고 드라마틱할수록 유효기간이 짧고
영원히 사는 이들도
딱히 예외는 아니다.
…
처음만은 순탄했다.
세상만사에 존재하는
계획이 그렇듯이.
그녀는 상점의 일손을 도와주고
영업을 끝낸 이후에는 취업을 준비했다.
무엇을 하고 싶냐는 물음을
그녀는 예술, 로 뭉뚱그려 답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음악을 연주했다.
바라보는 세상을
해석하고 표현할 때면
귀향자가 고향에서 느끼는
아늑한 흥분을 감지할 수 있었다.
열정이 있었고
희미하지만 재능 역시 있었다.
엘렌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색채가, 선율이, 나지막한 목소리가
복도로부터 넘실거렸다.
엘렌의 연애도
눈에 띄는 진척을 보였다.
둘은 엘렌이 마음에 들어하는 남자를 찾아가
‘우연한 만남’을 가장해 접촉했고
능력을 사용해 조우의 순간을
일종의 순정만화처럼 만들었다.
실패도 잦았고,
효과가 없는 경우도 많았지만,
아주 가끔,
형식적인 문답 이상의 대화를
나누는 날도 있었다.
그리고 수요일이 되면
둘은 기다렸다는 듯
담요 하나를 두 쌍의 무릎에 덮고
라디오를 들었다.
고민 여신의 사려깊은 목소리는
언제나, 어떤 사연에도
응원과 격려를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그것은 소녀들의 동력이었으며,
스스로에 대한 근거였다.
“할 수 있어요”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가능성을 믿어요”
“당신은 재능이 있어요. 분명해요”
그녀가 그들을 아는지는 불분명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DJ의 확신에 찬 어투를,
소녀들은 온 힘을 다해 믿었다.
꿈과 연애, 그리고 미래를
낙관에 결부시킨 실천으로 성취해 낼 것을
간절히 소망하며.
두 소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최소한, 처음 한 달 동안은.
그리고 동거를 시작한 지 세 달 쯤 되는 현재,
둘은 영업을 일찍이 끝내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녀는 영나암에서 대출한 신간 추리소설을
반나절이 지나도록 놓지 않는 중이었으며
반대편에는 일기를 끼적이는 엘렌이 있었다.
“이 안경잽이는 대체 왜 이렇게 자주 얼굴을 들이미는지 모르겠네. 매력도 없는데.”
“뭘 모르는 구나~ 이 캐릭터야 말로 작품의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키 퍼슨인데 말이지”
“이 시리즈에서 주연은 두 사람으로 충분해. 탐정과 조수 조합은 진리라고.
별 매력도 없는 캐릭터를 집어넣는 건 무리수라고, 무리수.”
“일단 싫어하고 이유는 나중에 찾는 거 아냐?
저번에 일했던 가게의 안주인이, 그 안경잡이랑 닮았다며.”
“내가 그 얘기는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니?”
그녀의 신경질에 엘렌은
무릎에 누워있는 고양이에게
귓속말 하는 시늉을 하는 것으로 답했다.
다 들리게.
“어머, 어머, 세 달 전 일이 아직도 쓰라린가봐. 이를 어쩌지, 아리스토텔레스?“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린다.
화난 것도, 불안한 것도,
어떻게는 슬퍼보이기도 한다.
“내가 나간 거라고 몇 번 말하니. 대놓고 초과근무를 요구하는데다, 머리 벗겨진 아저씨들의
말 상대는 계약에 없었어. 서양식 레스토랑이라고 했다고! 오직! 밥만! 먹는!”
“그러곤 그녀는 컨디션 불량을 이유로 세달 동안 쉬어버렸습니다.
참고로 이건 아무것도 안하고 뒹굴거렸단 뜻이에요.”
“알지도 못하면서. 지금같은 불경기에선 능력이 있던 없건 족족 퇴짜맞는 상황이라고.
거문고 연주만으로 먹고 살려면 츠쿠모가미하고 경쟁해야되는 신센데,
날 때부터 달인인 애들이 경쟁상대인 시장에서 대체 어떻게 이겨먹으라는 건데.”
“그러니까~ 눈을 좀 낮추라는 거야. 거기서 경력을 쌓고 올라가면 돼잖아.”
“글쎄 아저씨들 말상대는 하기 싫다고!
너 연애 안되는 거 알겠는데, 히스테리는 좀 딴 데서 풀면 안돼?”
“어머머, 그게 무슨 소리래~”
엘렌은 여전히 웃는 표정이지만
경련하는 입꼬리는 동요를 숨길 생각이 없다.
“계약과 다르게 행동한 건 너잖아~ 뭐? 능력을 쓰면 다 넘어올 거라구?
아가씨 덕분에 그래서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 있나요?
그래, 러브레터는 많이 오지. 오늘도 왔고. 한 번 읽어나 볼래?”
“...당신의 흑단같이 고운 머릿결은 꿈 속에서도 선명합니다. 저는 그때부터 당신의...”
첫 문장부터가
정확히 엘렌의 분통을 터트렸다.
“내 머리가 검은색이야?!
편지가 다섯 통이 오면 네 통은 우리 상점에서 일하고 계신 점원님 꺼고요,
한 통은 소포까지 동봉한 편지라구!
이게 네가 말하는 사랑이야? 상대적 박탈감이지!
세상에, 리볼버를 주면서 ‘당신이라는 총알이 심장을 꿰뚫었다’고 쓰는 낭만파 도련님 코는
대체 어디서 꿴 거야?”
“줘도 못 먹는 네 괴멸적인 센스를 알면
충분히 정상참작이 될 지경인데?
설마 소개팅에서 첫사랑 얘기를 꺼내 놓으셔서
상대가 어린 시절 신분의 차이로 마음을 정리했던
소꿉친구를 향한 감정에 다시금 눈 뜨게 해 주는 수준이었다면
애초에 제안을 안했지 내가!”
"여기 사람들 취향 문제일 뿐이야!
검은색 생머리가 잘 먹히는 거지.
파직파직한 곱슬머리를
생머리로 바꾼다면
나도 가능성은 충분하거든!”
"연애를 못하는 모든 사람들은
왜 하나같이
씨알도 안 먹힐 이유를 들이대는 걸까.
집단 무의식의 발현, 뭐 그런거니?"
"조용히 해!
그 전에 이건 명백한 계약 위반이야!
약속하고 다르니까!"
한껏 달아오른 둘의 말싸움을 중단시킨 것은
문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소리였다.
“어라라, 급한 일? 보통 문 닫았으면 그냥 가는데?”
의아한 표정을 하고 용건을 묻는 목소리에
허스키한 여성의 목소리가 즉답했다.
“상점 특제 장미향 비누를 사려고 합니다.
친구가 너무 좋아하는데, 여기서 밖에 구할 수 없다보니.”
그런가요?
단번에 경계심을 푼 엘렌이
망설임 없이 가게의 문을 열자
호쾌한 미소가 인상적인 정체불명의 손님이
붉은 면바지 끝단까지 내려온 흰색 장발을 흔들거리며
가게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었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은 장미향 비누를 한껏 손에 든 채로
계산대에 선 그녀 앞에 섰다.
말싸움 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한 눈초리의 그녀와 달리
손님 쪽은 장난기가 만연하다.
“거스름돈 입니다. 상품을 들고 갈 바구니가 필요하신가요?”
눈길을 주지도 않으며
애써 사무적인 투로
말을 건네는 그녀를 보곤
손님은 고개를 으쓱하며
꾸며낸 듯한 웃음으로 너스레를 떤다.
“오, 그래주면 고맙죠. 그런데, 아가씨가 요즘 유명한 미인 점원 맞으신가요?
내 친구가 학교 선생님인데, 사춘기 꼬맹이들이 요새 아가씨 보러
이 외딴 곳에 세워진 가게로 굳이 몰려다닌다고 걱정이 많아요. 혹시 아시나?”
적의 외에는 읽을 수 없는 얼굴을 한 채
그녀는 우아한 동작으로 입가에 손을 갖다댄다.
“어머, 타인에게 관심이 지대하신 분이군요.
느그 애비가 손님께 이 정도의 관심을 보여주었으면
지금같은 관심종자가 되진 않았을 텐데, 참 안타깝죠.”
“하하, 지나간 일인걸요. 후회해봐야 잠만 설치죠.
그보다, 이제 이야기 할 마음이 드는 거야?”
“아뇨. 전혀 없네요. 출구는 뒤 돌아서 바로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이미 뒤돌아선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손님은 말한다.
“너희네 의사 선생님 때문에 왔어. 이나바가 얘기해주더라.
암만 살면서 짜증이 난대도 말이야.
해도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지.
널 위해서 모든 걸 버린 사람 마음을
어쩜 그렇게 난도질하고 집을 나가버리냐고.”
“니가 뭘 아시는데.”
선생님, 이 역린이었던 듯
쏘아붙이는 목소리는
냉랭하기 그지없다.
“너무 잘 알지.
몇년 동안 집 밖으로 안나가는 한심한 년과
대화 한 번 하려고 하니까
키워주고 먹여준 은혜는 깡그리 잊고
먹이를 주는 곰과 먹는 법을 알려주는 곰 예시 운운하면서,
당신이 먹여주고 키워줬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한심해졌다는 걸
변명이라고 지껄이고,
그 와중에 그 보호자가 쥐어준 용돈 가지고
도망친 얼간이가 내 눈 앞에 있다는 거.
이 정도면 충분하냐?”
“당장 나가.”
“걱정 마.
그러지 않아도 나갈거야.
너희 선생님이 그래서 지금 많이 힘들어 하니까
지금이라도 연락하라고.
그 얘기만 하러 왔는데,
딱히 뭘 이루지도 못하고 어영부영 사시는 꼴을 보니
자꾸 참견할 말이 나오네.”
몇 걸음을 떼다가
다시 돌아본 손님의 눈에도
상대방과 같은 깊이의 증오가 서려 있다.
“생각해보면 넌 항상 그런 식이었어.
일이 이 지경까지 된 데에 대해서 나몰라라,
내빼기에만 바빴지.
그 와중에 널 동정해주는
애꿎은 사람들 인생을 파괴해나가면서.
지구에서 달로,
그 다음엔 달에서 다시 지구로,
이제는... 여기냐?”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침묵했다.
더 이상 서로의 얼굴을 보기도 역겨운 듯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채.
“거, 소란스럽게해서 미안합니다.”
완벽하게 자신이 소외된 상황에
멍하니 있는 것으로 대응하던 엘렌을 향해
손님은 고개를 숙이곤 가게를 떠났다.
그녀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로 들어가 버려
엘렌은 홀로 남아
현 상황에 대한
설득력없는 가설들을 머릿속으로 만지작댔다.
그래서 쟤네 왜 저러는 거야?
…
마지막으로 햇빛을 본 게 얼마전인가
바깥에 대한 기억은 아득하기만 하다.
겨울은 지나갔을까
이미 봄일까.
라디오의 여신님은 감기 조심하라고 했으니
아마 겨울이겠지.
그녀에게는 고맙게도,
엘렌은 그 후로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았다.
감정을 훼방놓는 불청객도 찾아오지 않았다.
기사감이 느껴졌다.
궁궐과 달의 도시에서 느꼈던 속박감이
그녀를 에워쌓았다.
차이점이 있다면
방 구석으로 유폐시킨 당사자가
스스로라는 점이었다.
발닫는 모든 곳이 비로소 자유였으나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자유의 이자는 불안이었고
그것은 단리가 아니라 복리였기에
어영부영 지내는 불성실한 채무자가
감정적으로 파산하기란 쉬웠다.
정말이지, 쉬웠다.
냉엄한 현실이 찾아올 때마다
그녀는 라디오를 찾아 들었다.
여신님의 방송을 녹음한 테이프가 수십 장.
그것을 닳고 닳을때까지 듣고 또 들으며
지금의 당신이 아름답다는,
무엇이 있던 간에 당신을 믿는다는
아늑한 목소리를
호흡이 닿는 한 흡입했다.
여신님의 목소리가 미치는 온난한 이곳과
그렇지 않은 바깥은 온도차는 이제 너무나 커져서
긍정의 말을 되뇔수록
그녀는 골방의 더 깊은 곳을
애벌레처럼 파고드는 것 외엔
도리가 없었다.
종종 그녀는 가위에 눌렸다.
다다미가 부스러지는 감촉에 눈을 뜨고
한기가 낮게 서린 방에서 눈만을 깜빡인다.
…
느닷없는 기시감.
무심코 흘러들어오는 기억에
그녀의 숨이 멎는다.
날 찾는 소리
내 얼굴을 보고야 말겠다는
고관대신들의 성난 목소리가
장문 밖에서 들려오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귀 조차도 막지 못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장막 뒤에 앉아 있는 나는
다다미의 궤적을 보는데 골몰하지
수많은 사람의 그림자들
회장에서 얽히고 섥혀
꿈틀거리는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실루엣이
인간의 팔과 혀로 이루어진 촉수를 꾸물거리며
다가와
다가오는데
도망가는 수 밖에 없잖아.
과정은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종착지는 항상 만월
휘엉청 뜬 보름달은
가증스러울 정도로 이글거리고.
항상 내 눈 앞에 서서
뇌리를 하얗게 태워나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거야.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나는.
평생에 걸쳐 반복되고 반복되다
결국 삶 자체가 되어버린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니까.
날이 새자, 가위는 풀렸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로, 그녀는 체념과 함께 움직이지 않는 하루를 시작하려 한다.
가게에서 금방 돌아온 엘렌이
그녀를 두들겨 깨우기 전까진 그랬다.
…
"자~주목!"
"으어?"
"말하는 법도 이젠 잊어버린 거야?
이걸 봐. 뭐라고 생각해?"
"엄청 많은 편지."
"그래. 정확히는 러브레터지. 네 앞으로 온."
"아냐, 믿음을 가져. 네 것도 하나 쯤 있겠지."
"나도 이걸 다 까보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럼 그냥 아궁이에 넣어 태워 줘.
제가 연애편지를 하도 읽은 나머지
겉봉만 보고도
전개와 마지막 문장을 예측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가지게 되었거든요."
"문제가 아니라구 그게.
여신님 방송,
요즘 연애고민이 대폭 늘었잖아."
"다섯 건 중에 세건은 짝사랑과 고백 사연이지."
고민의 편중된 성격에
시청자들의 비판이 쇄도했지만
연애 고민을 넣는 시청자들이
대체로 고액후원자라
유야무야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무엇보다도
여신님은 연애에 관해선
은근히 잔뼈가 굵은 조언을 해서
오히려 퀄리티 자체는 높아졌다는 평도 많았다.
의외로 경험이 많은 건가?
"너에게 온 편지들을 읽다 깨달은 사실인데,
요즘 들어오는 연애 사연 보낸 사람들,
문체로 보나 사연으로보나
죄다 짝사랑의 당사자가 너야."
고양이를 쓰다듬던 그녀의 손이 멈췄다.
방문을 닫아도
찬 바람은 어떻게든 들어오는 건가.
그녀는 자세를 몇 번씩 고쳐 앉는다.
"그런 사연들에 대해 여신님은 항상 같은 말을 하지."
"...용기를 내세요. 당신의 사랑을 응원합니다."
"그래서인가. 요즘 가게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성급해졌어.
눈에 쌍심지를 키고 널 찾는다구."
그렇구나,
그녀는 입가를 짓이기는 듯한
씁쓸한 웃음을 보인다.
“알게 뭐야.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유야무야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냐! 네가 취직이나 사회활동을 할 경우에 발생할
문제들을 생각해보면…!”
들어 봐. 낮고 침착한 목소리가 엘렌의 말을 막는다.
걱정 할 필요 없어. 당연한 일이니까.
그녀는 엘렌에게 말했다.
엘렌은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절망의 한계치에서 내비쳐지곤 하는
초연함이 표정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단단해진 절망이 울음을 터트릴 기운도 가져간 탓으로 지어낼 수 밖에 없는
슬픈 웃음을.
…
이런 일은 내 삶에선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거야.
세월은 지나는데,
나는 도무지 바뀌질 못해.
미래를 피하기 위해
다르기 움직이지만
멀리서 보면
항상 같은 궤적으로 움직이고
그래서… 결국 같은 풍경을 보게 되는 거지.
이건 저주야.
태어날 때 부터 내게 부여된
영원의 저주라고.
그럼 상황은 간단해지지.
이때까지 해 왔던걸 하면 되는거야.
"도망쳐야겠어."
그녀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에?
엘렌의 물음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설명한다.
자신의 행동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이건 그냥 도망칠 시기가 온 거 뿐이야.
모내기철, 추수철 뭐 그런 거야.
나한테는 자연스러운 거라구.
내 물품은 네가 처분해 줘
사람들한테는 대충 둘러대고.
아니, 그냥 병 걸려 죽었다고 하는 게 낫겠다.
돈은 필요없지?
우리집에서 온 이나바가 내 친구비 너한테 입금하는 거
내가 다 봤거든? 그거면 된 거잖아?"
이제까지 밍기적거렸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속하게 짐을 챙긴다.
"지금까지 고마웠어! 건강하렴!"
페이스에 따라갈 수가 없네.
부산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에
현기증마저 느끼는 엘렌이었다.
…
"그래서, 어디로?"
"...어디던 간에."
"다른 방법은 없는거야?"
"이건, 일종의 저주야.
어쩔 수 없어.
이게 내 운명에 새겨진 패턴이야."
"저주?"
"난 무언가를 이룰 수 없어.
그렇게 태어났거든.
억압이 있을 땐 자유를 바라지,
정작 자유가 주어지면… 아무것도 하지 못해.
이번만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를 거, 하나도 없었어.
무언가가 내가 내 뜻대로 살아가는 걸 막는 느낌이야."
그러나 엘렌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거두지 않는다.
자신이 본 바로는
그녀의 자유를 막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녀 자신일 터이다.
높은 기준으로 일자리를 차버린 것도 그녀고,
무료하게 뒹굴거리던 시간들을 보낸 것도 그녀였으며,
그녀를 돌보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것 역시,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것을 알고 있다.
"한심하게 보이는거 나도 알아.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립한댔으면서
정작 누군가로부터 오는 은밀한 혜택을
거부하지 못했지.
아니, 이것도 거짓말이야.
사실, 그걸 은근히 바랬고,
그걸 받도록 사람들을 부추겼지.
그래도 어떻게?
게으름과 의지의 박약마저도,
내게 걸린 저주의 일부인 걸."
침묵이 흘렀고
떠나가려는 발걸음을
불러새우는 건 하나의 질문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뭔데?"
"네가 말하는 저주란 거, 누가 건 건데?
"나 자신."
"아니. 그럴 땐 '모른다'고 해야지.
네가 바라고 건 적 없잖아."
알면서, 그럼 왜 묻는건데.
짜증에 머리가 시큰해진다.
이런 말 할 상황 아니란 거 너무 잘 알고
그럴 자격 없다는 것도 아는데,
입을 틀어 막고 그대로 가기에는,
혀가 너무 재빠르게 움직인다.
"타고 난 거니까 내가 건거지.
자꾸 잊어버리고 마는… 네 저주처럼."
입이 방정이다. 정말로.
…
엘렌을 향해 그녀가 느꼈던
이상한 친밀감은
둘이 종족적으로 동류라는 점에서,
그러니까, 불로불사의 존재라는 점에서
이루어졌는지도 몰랐다.
차이가 있다면,
그녀의 불사가 육체에 국한하는 데 비해,
엘렌의 불사는 기억과 정신에까지도 관여했다.
기억은 새로 얻은 기억만큼 덧씌워졌다.
그녀는 엘렌이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을 알았고
한 두달 전의 일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떠올리지 못하는 것을 알았다.
확신을 얻기 위해, 그녀는 일기에 쓰인
고양이의 이름을 슬쩍 바꾸었고,
예상은 적중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엘렌은 애써 너스레를 떤다.
"네가 기르는 고양이, 이름이 뭔데?"
"아리스토파네스 얘기하는 거야?"
"저번 달에는 플라톤이었어.
그 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 그 전에는 소크라테스"
"에헤헤… 들켜버렸잖아? 정말~"
저건 가면으로 봐야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쑥쓰러워 하는 거야?
평소와 다름없이 천진한 반응에
맥이 빠졌지만,
한편으로는 그랬기에
더 깊은 곳에서 말을 길어 올렸다.
"너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알고 있을 거 아냐.
헤어스타일이 문제가 아니잖아.
네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연애는,
애초에 불가능해.
한 달 단위로 되돌아가는 기억으로는.
그러니까… 우린 바뀔 수 없는 저주에 걸려
영원히 차안을 떠돌 운명인거지."
그렇게 그녀는,
달뜬 목소리로 그렇게 꿈과 사랑을 이룰 것이라 선언했던 장소에서
그것의 끝을 선언했다.
말을 끝내고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엘렌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려 터덜터덜 출구로 향했다.
"... 네 말이 맞아.
이건 저주야.
우리 둘 다 저주에 걸렸었던 거야.
이걸로 확실해 졌네."
등 뒤에서 엘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할 나위 없이 침울한 기분에 압사당하려는 그 순간
불현듯 엘렌은 외쳤다.
"이건, 마법 사건인 거라구!"
예?
잘못 들었습니다?
…
"처음부터 이상했어.
우리의 생활, 이상하리만치 나쁜쪽으로만 흘러갔다구.
이건 확실히 저주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겠어."
뭐라는 건가.
"음… 내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 같은데,
내가 말한 저주란건 실제 저주 마법이 아니라
일종의 메타포로써…"
"어쩐지 머리카락에서 반응이 찌릿하고 안온다 싶었어.
하지만 너와 나 둘 다 저주에 걸려 있었다면 설명이 돼!
나 역시도 저주에 걸려있어서,
마법을 식별해내는 내 머리카락이 둔해진거야!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백수인줄만 알았는데, 정말 대단하잖아?!"
에...저기요?
그녀는 당황해 흥분한 목소리로 반박한다.
"외부에 책임을 돌리지 말라고 얘기한 건 너잖아?!
이건 그런 속 편한 문제가 아니라고.
의지와 마음가짐의 문제라니까?
까놓고 말해 내가 문젠 거라고.
이해가 안돼?"
"그렇게 겸손할 것 없어!
이게 저주 마법이란 걸 밝혀낸 건
전적으로 네 공이니까.
좋아, 저주인 이상 매개체가 있을 텐데,
최근엔 밖으로 안나갔으니까,
반입한 물품은 아닐테고,
아니, 들어온 게 물품만은 아니야… 혹시… 설마!"
갑자기 저주 마법에 대한 견해를 주절거리며
부산스럽게 방 안을 빙빙 도는 엘렌을
그녀는 얼떨떨한 눈빛으로 바라 볼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흥분한 엘렌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지금 당장 라디오를 켜! 주파수는… 영나암 채널으로!"
"여신님 채널? 갑자기 왜?"
"물품이 아니라면, 바깥에서 들여온 건 이것밖에 없어!
네가 맨날 수신하던 전파 말이야! 그게 범인이야!"
그녀는 시키는 대로 라디오를 조작했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여신님의 방송날이었다.
여신님의 천사같은 목소리가 방안을 채움과 동시에
소녀의 곱슬머리에서 타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정전기였다.
"...여신님이 저주를 걸었어."
엘렌은 경악했다.
"청취자 전원에게, 불행으로 이끄는 저주를
쏘아 보내고 있었다고!"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리니! 여신님이 왜?!"
"나도 몰라, 하지만 방송이 저주의 원천이란 건 확실해!
빨리 영나암으로 가서 방송을 막아야…"
그 순간,
가게의 현관문의 손잡이가 날아갔다.
손잡이가 있던 구멍으로
근육질의 남자 손이 쑥 들어오더니,
덜컥, 걸쇠를 풀고 잠긴 문을 열었다.
"이건 또 뭐야?!"
그녀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내가 말 안했어?
네게 연애편지 보낸 사람들이
오늘로 끝장을 보기 위해 이쪽으로 진격중이었어!
어제 자 방송에서
여신님이 남자답게 끝장을 보라고 충고해주셨거든!
그때부터 조짐이 보이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은..!"
"한 적 없거든?!
그런 중요한 사실은 진작에 좀 말하라고!"
"어라라~ 네 신세한탄 듣다가
그만 까먹은 모양이네!"
어지간하면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는 엘렌 역시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다.
"아가씨! 계십니까!"
"연인이 되어주십쇼! 부탁입니다!"
"편지를 보낸 다나카입니다! 기억나십니까!"
"처음 볼 때부터 사랑했습니다!"
물론, 몰려온 수십명의 남성만큼은 아니었다.
남성들의 무리 뒤로는
여신님의 청량한 목소리가 배경음처럼 울려퍼졌다.
누군가 청취중인 방송의 볼륨을
최대로 증폭시켜 틀어 둔 모양이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란 없습니다.
사랑은 먼저 나아가서 쟁취하는 거에요.
나아가세요. 전 당신을 믿어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
할 수있어요 할수있어요할수있어할수있어
할수있할할할할할할수할할할할ㅎㅎㅎㅎㅎㅎㅎ"
그마저도 음성이 깨져서 사람보다는 귀신에 가까운 목소리다.
그러나 소 뒷걸음질에 쥐잡은 격으로
뒤틀린 여신님의 목소리는
풋풋함과는 거리가 먼 사내들의 욕망에 정확히 공명했고
사내들은 자신들의 단순무식한 욕망에 잠식당했다.
그런 연유로 밖은 이미 광기와 욕망으로 가득찬 수컷들의 제전으로 화한지 오래였다.
"쟤네 여신님의 팬 맞아? 어떻게 청아한 목소리를 저렇게 만들고…"
"지금은 팬심 발휘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단은 빨리 영나암에 가서 송출을 막아야 해."
말없는 시선의 교환이 있었고,
그 직후 둘은 움직였다.
엘렌은 그녀가 싸 놓은 짐에서
구혼 선물로 받은 총을,
그녀는 엘렌이 몽환 유적 답사로 받은
특제 양자 다이너마이트를 손에 쥐고
뒷문으로 달려나갔다.
달아나는 두 소녀 뒤로
울려퍼지는 총각들의 외침은
달 까지 닿을 기세로 퍼져나갔다.
…
자정 무렵, 영나암 근처 골목.
"... 더 이상은 진입이 불가능해.
갈 수 있는 모든 경로가 사람으로 막혔어."
"날아서 가면 되잖니?
인기없는 네가 날아가면 되잖아."
"하하, 엽총을 들고 하늘을 겨누는 중인
사람들을 보면
그런 말 나오기 쉽지 않을 텐데"
진심으로 질린 기색으로
그녀는 헛구역질을 했다.
"진짜 죽여서라도 데려가려는거야 저 사람들?"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저주의 기운이 극도로 강력해지고 있어
여기서 일반인 정도의 정신력은
물에 떨어진 휴지처럼 흐물흐물해진다구.
일단 직접 영나암으로 쳐들어가는 계획은
포기하는 수 밖에 없겠…
어라라? 지금 뭐 하는 거야?
그걸 왜 거기에 넣어?"
"자폭용."
비장한 얼굴로 그녀는
가슴 사이로 다이너마이트를 쑤셔넣고는
심지를 소매 밖으로 끄집어 뺐다.
"답이 없어.
이번엔 그냥 죽어버리고
잊혀질때까지
몇년 간 숨어 있지 뭐.
익숙해, 익숙해."
흐흐흐,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실성한 듯 웃고 있다.
위험한데, 이거.
엘렌은 애써 그녀를 설득한다.
"좌절하긴 이르거든.
저주란 건 마법 중에서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에 속해.
저주를 하는 자는
무덤을 두개 파라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구.
거기다 이렇게 전방위로 뿌려대는 상황은
'저주 되받아치기'를 하기에
더 없이 완벽한 상황이야.
마침 저주의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모여있어.
상황만 갖춰진다면
이 모든 저주의 마력을
이걸 쏘아올린 당사자에게
날려버릴 수가 있는거지."
엘렌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총각 연합의 에너지를 한 지점에 집중 시켜
그것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는 그 순간
엘렌의 마법으로
한꺼번에 되받아치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은,
"나보고 만들어 내라니?
장난해? 나를 보면 저 짐승들이
뭘 할지 상상이 안가는 거야?"
"그… 아! 그러니까 예전에 보여줬던 능력처럼 하면 돼.
그러니까 네가 귤이라고 생각을 하면…"
싸늘한 눈초리에 엘렌은 눈을 피한다.
역시 어지간히 찝찝한 모양이다.
"못 해! 답은 이것밖에 없어! 언제나 이것 뿐이야!"
반쯤 정신을 놓을 얼굴로 성냥을 품에서 꺼낸 그녀를
엘렌은 온 힘을 다해서 막았다.
서로를 활퀴고, 머리를 잡고,
손등이 뺨을 스친 것에 울컥해서
주먹으로 턱을 냅다 후려치는 등
한참을 실랑이로 버둥거린 둘은
기진맥진한 채로 벽에 기대
그대로 미끄러졌다.
"처음 볼 때부터 궁금했어.
넌 왜 그렇게 치열한 거니."
거친 호흡의 날숨에
진심어린 푸념이 섞여나왔다.
"결국 잃어버리고 잊어버릴거면서,
일기니 연애니,
손쉽게 윤색될 순간들에
왜 그렇게 목숨을 거는건데?
지금도 그래. 네가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잖아.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넌 여기에 관여되어있다는 것도 모른 채 살면 돼.
오늘 상처 입으면서까지 지킬 내일이
너에겐 없잖아.
결국 무한히 반복될 뿐인데."
음~ 하고 고민하는 소리를 낸 엘렌은
순진한 눈빛으로
똑똑히 묻는다.
"내일의 일을 네가 어떻게 알아?"
"..."
"너도 모르는 거잖아.
네 말대로 대충대충 살아버리다
어쩌다 기억이 날아가지 않아버리면 어떻해?
앞으로 안 올 기회를 놓쳐버린 걸지도 모르잖아.
후회하게 될 텐데,
그래도 괜찮은 거야?"
"그랬던, 적이 있었어?"
"에...아직은~"
대답이 그게 뭐야,
부질없는 일이잖아 결국.
사실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
그 부질없는 도망을
나는 항상 시도했으니까.
나도, 너도.
결국 변하지 못할 걸 아는데,
왜 평소처럼 행동하는 걸까.
왜 믿는 걸까,
가슴 어딘가에서
불가능하다고 판단내린 가능성을.
희망을.
"내 생각은 이래.
믿고 바라는 건,
사람의 본능이잖아.
그러니까, 바라는 한에서
너는 저주 받은게 아냐.
오히려… 축복인 거지!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뭐야, 평소에는 이해 못한 척 시치미만 떼더니,
다 생각이 있었잖아.
시침떼기로는 우리 이나바 못지 않는데.
총 좀 줄래.
그녀는 엘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이번에는 권총자살이냐는 볼멘 소리를
장난기어린 웃음으로 부정했다.
"오늘 밤의 난제는,
조금 잔혹할 거거든."
엘렌에게서 총을 건네 받고
붕, 하고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빛이 앞에 있다.
어둠으로 이행하기를 주저하는 듯한
휘엉청 밝은 달이 눈 앞에 있다.
도망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녀는 결국 자신의 한계를 시인한다.
나는 결코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얻은 굴레.
태어나 뱉은 첫 울음이 하나의 언명이고, 주술이 되어
평생을 속박할 천성이 되어 어제를, 오늘을, 내일을 휘감는다.
맑은 음악소리, 은은한 후광과, 머리가 아찔해지는 단내가 시야를 휘감고, 발목을 잡는다.
인간으로서의 그녀를 철저하게 파멸시킨, 저 아득한 달의 풍경.
누군가에겐 천상의 풍경일지언정,
그녀에게는 작두 위에서 추는 군무와 같았던 고통들.
더 끔찍한 것은 그것을 혐오하면서도 결국 그곳에 포함되고야 마는 스스로의 천성이다.
그 흩어진 자신의 세계를 세게 끌어안는다.
간신히 수면 위로 올라온 이가 쉬는 첫 숨과같은 공기가 목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괜찮다고,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불안의 메아리를 진정시킨다.
이룬 것 하나없이 거인들의 유적 위에서 살아가는 지루한 삶일 지라도.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태와 오만과 분노와 함께 남은 날을 견뎌낼 지라도.
그 결과 남은 것이 예상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뻔한 결말일지라도.
아직 끝은 아니다.
그 희망을 쥐어짜고 쥐어 짜
간신히, 폭풍에 휩쓸리는 마음을 지지할 닻을 내린다.
적어도 내 삶이 내게 내려진 저주는 아닐 것이기에,
그렇게,
그녀, 아니
타케모노가타리로 불리는
오랜 이야기의 주인공은,
달을 등지고 서서 덜떨어진 구혼자들을 내려다본다.
운명을 비웃는 듯 했던 만월은
어느 새 후광으로써 그녀를 지지한다.
달과 함께 떠오른 듯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이들에게 엄숙히 고한다.
"월하의 공주,
카구야히메가
난제의 답을 청하니
마음을 전하려는 이 모두
귀를 열고 들어라!"
…
“저는 항상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단정히 머리를 빗어넘긴
젊은 남자가 앞으로 나선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대략 이런 식으로 판에 박힌 대사가 튀어나오고,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뜨거운 말을 토해낸다.
거리는 웅변으로 가득찼다.
그녀는 말없이 한 손에 든 총을 들고,
허공을 향해 냅다 방아쇠를 당긴다.
총성이 단번에 남자들의 입을 틀어막는다.
간단히 주도권을 되찾은 그녀가 말한다.
“단순하게 하죠.”
약실은 개방한 뒤 탄피를 빼고,
실린더를 돌린다.
“그때처럼 시간을 벌고 싶은 것도 아니고.
요즘은 질질 끄는 전개는 유행이 지났더군요.
앞으로 나오세요.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총구에 이마를 갖다 대세요.
그런 다음, 당신의 진심을 보여주세요.
초연하게 죽음에 맞선다면,
죽음을 무릅쓰더라도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는 이라는 뜻이겠죠.
제가 방아쇠를 당긴 후에도, 아직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다면
데이트 약속 정도는… 잡아 드리겠습니다.
참고로 비용은 그쪽에서 전부 부담하는 걸로 하죠.”
거리 구석에 숨은 엘렌은 경악한다.
저런 조건으로 누가 나와!
아무리 저 사람들이 멀쩡한 정신이 아니라지만
대놓고 죽을 정도는 아니라구!
엘렌의 걱정대로, 남자들 사이에서 항의의 웅성거림이 커져간다.
어색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올백머리가 앞으로 나와 말한다.
“아니 농담이 조금 심하시군요. 아무리 그래도 그런 부담을 감수하고…”
그녀는 상대의 말을 가볍게 일축한다.
“그러면 돌아가시길.
저는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당신의 마음가짐을 명확하게 확인하고 싶을 뿐이지요.”
그녀는 허리를 조금 굽혀 남자들의 시야 아래로 들어선다.
굽힌 채 고개를 살짝 돌리자 흑단같은 머릿가락이 뺨으로 쏟아졌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청년들 하나하나를 훑는다.
비웃되 자신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듯이.
당신들이 여신님과의 상담을 계기로 용기를 얻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대들이 이곳에 선 것은, 단순히 사랑 때문이었나요.
소심하고, 나약하며, 현실과의 타협을 반복했던 스스로에 대한 반역이 아니었나요.
항의란 벽에 부딫치는 것으로 전해지는 것이니
저는 당신 앞의 벽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증명해보시길. 당신의 운명을 말입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고양이처럼 혀를 살짝 내밀고, 입에 붙은 머릿카락을 하나하나 떼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한 마디를 더한다.
살짝 부끄러워 하는 듯, 살짝 홍조를 띄며.
“데이트 비용에는 모텔비도 포함됩니다.”
무언가가 끊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함성과도 같은 기합소리가 누군가에 입에서 터져나오고,
거리가 거대한 환호의 파도에 잠겼다.
옛 이야기의 성검을 탐하듯
청년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총구에 머리를 들이대러 달려온다.
청년들 위로 씌인 저주가
열정과 정념에 섞여 비대하게 부풀어오르고,
군중 안의 광기와 반응하여 폭발한다.
눈 먼 짐승과도 같은 거대한 열정이
그녀를 무참히 덮치기 위해 달려온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노림수였다.
…
그들 안에 있는 모든 저주를 한 번에 되받아 치기 위해서는
수백명의 사내들로 하여금 섭취했던 저주를 모조리 토해내게 하고
한 방에 돌려주는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들을 유혹하는 것을 선택했다.
수백명분의 저주가 그녀라는 한 사람을 향해
한 방향으로 모이고, 한 점으로 압축된다.
능력을 사용하여 지금 이 순간을 다림질한다.
수유는, 늘고 늘어 곧 영원에 도달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저주까지 끌려나오는 것을 기다리며
그녀는 자신 앞의 열정들을 응시한다.
…
길 잃은 열정들이 다가온다.
바뀌고 싶어서,
늙어가는 몸뚱이에 붙어버린 지방과 같은
비루한 욕망들과 작별하고 싶어서,
단 한번, 한 순간만이라도
지금의 꼴사나운 몰꼴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바라는 자신을 향한 의지를 관철할 수 있다면,
팔이 부러지고 심장이 박살나더라도,
파도에 삼켜지고 지옥불에 불탈지라도,
그것으로 파멸하고 평생 후회하게 될 지라도
그것은 나는 아닐거라 믿으며
비명을 지르며, 그것을 환호라고 속이며,
그녀의 손에 들린 방아쇠를 당기려 달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을 기어코 무릎꿇릴 것이다.
그녀가, 엘렌이, 다가오고 있는 청춘의 무리가 이제껏 겪었듯이 말이다.
열정은 무뎌지고, 재능에는 한계가 있으며, 운은 따르지 않는다.
마음 쏟은 만큼 보답받는 일은, 별로 없으니까.
일보 전진 이보 후퇴,
일보 전진하고 또 이보 후퇴,
또 일보 전진하고 또다시 이보 후퇴
실패의 반복, 반복, 또 반복.
그러나 그렇게 실패한 그녀는 결국 여기까지 왔다.
결국 도망치지 못하고,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생판 모르는 이들에 둘러쌓여 고생을 하고 있다.
도망치기만 했던 그녀로서는, 한번 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생각한다.
풍경은, 분명 앞으로 나아갔다고.
후퇴하는 두 걸음은 예상보다 보폭이 짧았고,
나아가는 한 걸음의 보폭은…
의외로 컸던 것이었다고.
그러니까 오버하지 말고,
변하지 않은채로 살아서
내일을 보도록 합시다.
물러가는 와중에서도
앞으로 걷도록 합시다.
그 발랄한 소녀가 말했듯이,
내일은 혹시 모르니까.
“부탁할게.” 그녀가 말했다.
“맡겨 줘.” 익숙한 목소리가 답한다.
엘렌은 그녀의 앞에 섰다.
금색 곱슬머리에서 번쩍거리는 정전기가
태양의 플레어처럼 지면에 아지랑이를 그리며 일렁인다.
에잇,
가벼운 기합소리와 함께
섬광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온다.
곱슬머리로부터 흘러나오는 빛을 줄기들은
번개무늬를 그리며 부정의 기운을 뜯어낸다.
황금의 손이 다가오는 검댕이 묻은 청년들의 얼굴을
세차게 씻기는 것만 같다.
저주의 기운이 사라진 청년들이
하나 둘 잠들듯이 쓰러진다.
섬광은 쏜살같이 달려나간다.
어둠을 몰아내고, 잔영을 강가에 넘겨가며
그대로 여신님의 스튜디오인
영나암에 직격해, 그대로 폭발했다.
폭음이 멎고
그녀는 빛에 게슴츠레해진 눈을 뜬다.
사방이 밝다. 계속 밝다.
엘렌의 마법이 끝났음에도,
거리에 고인 밝음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깨닫자, 그것은 햇귀였다.
시야 한 가운데 서 있는 엘렌의 모습이 보인다.
엘렌은 당당히 서 있다.
새벽을 가르고 나온 아침의 틈새에서.
양 손으로는 브이 자를 그린 채로.
멋진 모습으로, 당당하게.
…
“모든 건 동생의 계획이었어요…
동생은 어찌되도 상관없으니까 저는 그만 돌려보내주시면 안될까요…헤헤…”
보통 이런 상황에선 반대가 되어야 하는 게 클리셰 아닌가.
이토록 뻔뻔하고 비굴하게 책임을 전가하는 인간말종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존경해 마지않던 여신님의 목소리로 찌질한 변명을 늘어놓는 언니 쪽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떻게 보면 방 안에 쳐박혀있을 때보다 마음이 아픈 것 같다.
“웃기지 마! 신앙이 모이는 것 같다고 좋다고 방송할 땐 언제고!”
동생쪽은 분노에 튀어나가 언니쪽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실랑이하던 둘을 잔뜩 열이 무녀가 진압한다. 언니 쪽은 동생이 떨쳐지자 기다렸다는 듯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는다.
“전 몰랐어요! 그냥 저는 적당히 동생이 써준 대본을 읽어주고 후원금만 좀 받는 줄
알았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능력이 전파를 통해서까지 될 줄은 몰랐어요 진짜 저는 좋은
의도로 참여한 거에요! 수익도 동생하고 PD가 대부분 가져갔고…!”
“당연히 그래야지! 일주일에 한 시간 대본 읽은 거 말고 한 일이 있어? 그마저도 귀찮아서
퍼지려고 한 거 간신히 일으켜 세워줘서 스타로 만들어줬더니만 지금와서 뚫린 입이라고…
그건 그렇고, 너도 좀 말을 해봐!
PD라고 꺼드럭 거릴땐 언제고 입 싹 닫고 있는거야?
출연자의 안전을 지키는게 PD의 임무라며! 그동안 돈을 받아쳐먹었으면 변호사를 부르든
뭐든 간에 해 보라고!”
“...”
그들 사이에 있는 모토오리 PD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천천히 눈을 뜬다.
눈을 뜨자 떨어지는 게
얼씨구, 눈물?
“…여긴 어디죠? 저는 분명… 설마 저 악독한 신들이 그동안 저를 세뇌하고 있었던 건가요?
”
“사업 자체를 니가 우리한테 제안했잖아! 이 쓰레기가!”
이런 파리덩어리같은 녀석들이 뭉쳐서
여신님의 고민청취같은 반짝반짝 하는 프로그램이 나왔다는 걸
차마 인정하기가 힘들다.
마침 뒤에 서 있는 엘렌 역시
산타클로스를 정면으로 부정당한 아이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윽박질러 셋을 조용히 만든 무녀 역시
오밤중에 갑자기 검거된 세 범죄자의 처우에 고심하는 모양이다.
“일단은, 뭐, 방송은 이런 문제가 발생했으니 해체를 할 수 밖에 없겠고, 너네 둘은 당분간
절에서 사회봉사를 좀 더 해줘야 겠고, 부서진 영나암은…”
“그럴 필요 없어. 이 방송은 영원정에서 인수할 거니까.”
“뭐?”
“이 방송의 청취자로서, 저 자매의 능력과는 별개로, 매력있는 프로그램이라는 건 잘 알고
있어. 동생이 썼다는 연애담, 솔직히 꽤 재미있기도 하고.
달의 기술력이라면, 저 빈곤신의 능력을 확산되지 않고 전파를 전송하는 것도 가능해. 이런
사고 없이도 충분히 방송을 이어갈 수 있어.”
수익은 이걸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하고, 온전히 자선단체에 쓰일
예정이야. 이 정도면 사회봉사가 되지 않을까?”
떫은 표정을 한 무녀가 쏘아 붙였다.
“아니, 니가 뭔데 판결을 맘대로…”
“기부할 자선단체는 일단… 여기서는 종교집단이려나? 신사나 절 같은.”
“멋진 생각이라고 생각해.”
자매들에게 구석에서 얻어맞던 모토오리 PD가 눈을 반짝이며 그녀 앞으로 튀어나왔다.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언니, 아니 국장님~ 그런데 인수인계나 기존 협력사 관리는
기존 직원을 고용하는게 훨씬 좋지 않을까요?”
“조종 당해서 기억 안난다며.”
“국장님처럼 시대를 앞서가는 리더가 있으면 없던 기억도 만들어 내야죠~.”
어떤 면에선 요괴보다도 더 고약한 꼬맹이다.
가벼운 웃음으로 모토오리 PD에게 대꾸하고,
좀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엘렌에게 다가간다.
“불만스런 표정인데?”
“그런 건 아니고, 좀 갑작스러워서. 음… 가출한 거 아니었어?”
“이제 돌아갈 거야. 돌아가서, 여기에 대해 이야기를 해 봐야지.”
“스스로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결심은?”
“지금 이 사건으로 평범한 삶은 물 건너 갔어. 그렇다고 네 말대로 은둔하고 다시 돌아올 수
도 없는 노릇이란 걸 알기도 했고.
그러니까, 스스로의 범위를 좀 넓게 잡기로 했어. 내 백그라운드라는게, 내가 원한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만큼은 이용해 먹은 다음, 그 허점을
파고들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볼거야.”
좀 갑작스럽니.
그녀는 묻고, 엘렌은 어깨를 으쓱한다.
“뭐랄까, 착한 부자가 어찌어찌 모든 분쟁과 모순을 해결하는 게 너무 디킨스적이네~
좋은 게 좋은 거라지만, 서사로서는 별로~”
“아, 이번 방송에는 협찬도 적극적으로 받을거야. 일단 네 마법가게와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그래도 그런 스타일이 난 좋더라~ 해피엔딩이잖아.”
엘렌은 휙 돌아서서 그녀에게 안긴다.
가슴이 훈훈해진다.
그래, 이거면 된거야.
음? 너무 훈훈한데, 가슴쪽이
가슴에 뭐가…
아, 엘렌이 창백한 표정으로 가슴께의 옷자락에서 무엇인가를 꺼낸다.
익숙한 물건이다.
다이너마이트, 뇌관이… 정전기에…
아직 안 뺐지. 그러고보니.
“어떻하죠?”
“어떻하긴. 집어 던… 이런 마을에선 그렇게도 안되겠네. 공중에서 폭발해도 파편이 튈지도
모르고.“
정말,
이 정도로 반복된다면, 지금까지의 깨달음을 다 무로 돌리고
이건 저주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럼 난 잠깐 집에 갔다가 다시 가게로 올 거니까, 저녁거리나 사 둬. 다 떨어졌더라.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다시 폭탄을 가슴에 집어넣고, 몸을 웅크린 채사람들을 피해 가게
구석으로 향한다.
모토오리 PD가 가장 먼저 그녀의 의도를 깨달았다.
“아니 지금 그러시면, 니 피와 살이… 우리 가게는… 아 시발 최소한 하늘로 날아서..!”
미안, 이미 늦었네.
충격이 온몸을 삼키는 것이 느껴진다.
불꽃이 혈관으로 파고들어가 시야를 판판이 조각낸다.
고통 속에서, 죽림에 있을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자,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최대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대화를 해 보자.
내일에 대해서, 사로잡혔다고 생각했던 저주에 관해서,
어쨌든 같이 살아가야 하는 내일에 대해서.
많이 화났겠지.
한 대 맞을 각오를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내게 남아있는 날 중 가장 추운 날은 아니며,
최악의 하루는 앞으로 무수히 예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오늘처럼,
아무리 나라도, 뭐라도 해낼 수 있으니까.
그런 날이 올 것을 믿어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부활 이후의 순간들을, 그 다음 순간을, 그 다음에 있을 어쩌면을 상상한다.
밖은 아직 한낮이고,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많다.
<끝>
https://drive.google.com/file/d/173IPEwWH25nNaJtOWDcocHxYZ7iNn6pA/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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