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글을 읽다가 문득 이 말에서 동방프로젝트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떠올렸다. 바로 '환상'이다. 환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동방프로젝트에서 제시되고 또한 일관되어온 키워드다. 동방프로젝트에서 환상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가. 이 글은 그것에 대한 논의다.
2. 환상의 정의
환상향은 잊혀진 자들의 낙원이다. 그런데 잊혀졌다는 게 뭘까? 그저 사람들이 모른다는 걸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바깥세계에서도 엄연히 신화나 민속설화를 알고 있다. 그저 이를 허구로 취급할 뿐이다. 잊혀진다는 것은 그것이 미지의 것이거나 불가지의 것이란 게 아니다. 그것을 가까이서 직접 보면서도 믿지 않으며 간과하고 무시하게 되는 것이 잊혀지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방식이 인간에게 뿌리내리며 많은 것들이 환상이 되었다. 처음 제시된 문장도 이를 거론하는 것이다.
비슷한 논의를 진행하는 위 글에서 나온 정보를 바탕으로 환상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을 2가지 알 수 있다.
1)한때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2)현재 혹은 어느 과거 시점부터 허구(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로 여겨진다.
소설이나 영화 같은 경우는 민담이나 신화와 달리 애초에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진 적이 없으므로 환상이 아니다. 또 주의할 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허구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룡은 멸종했지만 과거의 존재는 사실로 여겨지기에 허구가 아니다. 상온핵융합은 과거 가능하다(실재한다)고 여겨졌으나 현재 부정되어 허구로 여겨지므로 환상이다.
3. 환상들이와 환상향
환상은 원점부터 부정되어 말소될 입장에 놓이게 된다. 더 이상 인간은 밤의 어둠을 두려워하지도 신적 존재에게 의지하지도 않았다. 인간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은 오히려 이를 가속시킬 뿐이다. 그러자 여기서 유카리를 필두로 강구된 것은 환상향이라는 환상들의 방주였다. 환상향을 바깥세계와 구분짓는 것은 2개의 결계다.
1)환상과 실체의 경계-약 500년 전
2)하쿠레이 대결계(상식과 비상식의 결계)-1884년, 메이지 17년
환상과 실체의 경계는 말 그대로 환상이 들어오게 하는 것, 즉 환상들이의 원천이다. 아마도 환상들이에는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마미조 같은 경우는 아주 뒤늦게 환상들이했다. 한번 환상이 되어 환상향의 주민이 되면 바깥 세계로 나가는 것이 무척 힘들어진다고 한다. 그건 경계 안으로 들어서는 것, 환상들이가 환상임을 확정짓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환상향은 기후나 식생, 자연환경 등 여러가지를 바깥세계와 공유한다. 이를 통해 환상향 내부에는 환상과 비환상이 공존한다고 알 수 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환상향은 잊혀지는 요괴를 보존하기 위한 장소지, 멀쩡한 실체를 배제하기 위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으로 환상향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4. 동방의 환상들이 화소
동방 공식작 중 환상들이가 설정에 들어간 것은 홍마향, 풍신록, 신령묘이다. 그리고 천공장은 환상과 밀접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홍마향의 홍마관은 환상향에 환상들이한 후 흡혈귀이변을 일으키고 그게 계기가 되어 스펠카드룰이 제정되었다. 다만 홍무이변의 본 작품에 그것이 언급되지는 않는다.
홍마관은 환상향 신참인 서양권 요괴라는 점에서 이질적이다. 상하이 조계지 모티프가 적용됐을지도?
최종보스가 블라드 체페슈의 후예를 사칭하는 출처불명의 흡혈귀라는 점에선 구작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풍신록의 모리야 신사는 현대에 잊혀진 신앙을 찾아 환상들이하였다. 환상들이 한 후에는 사람들에게 환상이 되어 허구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어쩌면 환상향의 본래 목적에 가장 충실한 사례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더 얘기하겠다.
신령묘의 몽전대사묘는 쇼토쿠 태자 허구설로 환상들이했다.
마타라 오키나는 천공장오마케에 이렇게 나온다.
<그러고보니 비신이긴 해도 그는 숨어있는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모든 걸 보이고 있었던 비신인 것이다.>-천공장 오마케 중-
이것은 앞서 말한 환상의 정의와 유사하다. 보고도 믿지 않기에 환상이듯이 숨지 않아도 알아봐주지 않기에 비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실로 환상향의 현자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겠다.
5. 환상의 역사
동방프로젝트는 탄막슈팅게임을 근간으로 한다.
<어떤 캐릭터든 쓸데없이 세세하게 설정이나 스토리를 준비해왔지만 선보일 기회가 좀처럼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특히 게임 중엔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요.(웃음) 애초에 탄막으로 스토리나 캐릭터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슈팅 게임 중에서도 상당히 특이해서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미묘합니다. 그 때문에 게임에 낼 수 없는 성격을 가진 캐릭터도 나오니까요. (린노스케같은 타입에게 탄막은 무리(웃음))
그래요, 캐릭터의 설정도 스탠딩 일러스트의 대화도 전부 탄막의 연출을 위해 있는 겁니다. 냉기를 다룬다는 것을 회화에서 말하고, 그 직후에 냉기 스펠카드를 쓰죠. 그래서 탄막이 즐거워보이는 겁니다. 회화가 없으면 스펠카드 시스템의 반은 죽어버립니다. 가능한 건 전차가 탄을 쏘는 정도의 상식적인 탄막이나 의미없이 휘거나 멈추기만 하는 탄막 뿐이겠죠. 요우무처럼 반죽음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반대로 말하면 회화는 탄막을 위해 있는 것 뿐이므로 내용에 스토리성이 부족하게 됩니다. (;;)이런데 어떻게 2차창작을 하는 걸까요?^^;>-영야초 오마케 중-
동방홍마향의 일어 부제 '21세기의 20세기 연장형 탄막슈팅게임'에서 ZUN의 탄막슈팅게임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사실 괴기담을 냈을 때, '탄막 계열은 슬슬 한계일까'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착각을 한 모양입니다. 게임에 한하지 않고 창작에는 크게 나누어 두 부류가 있습니다. 대중에게 넓게 받아들여지기 위한 창작과 극히 일부의 사람이 깊게 즐기기 위한 창작입니다. 상용(이걸로 밥을 벌어먹기 위해서는) 작품은 전자여야만 합니다. 물론 탄막은 후자로, 깊게 즐길 수 있는 유저를 선정하는 소재였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엔 세상에 슈팅 게임이 별로 나와 있지 않아서 슈팅 게임이 망했다고 생각한다고 봅니다. 아마도 이 이후로도 슈팅 게임의 수가 늘어나고 그러진 않겠죠. 어쩌면 자기나 주변 사람, 잡지나 인터넷 등에서 슈팅 게임은 재미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혹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망했다고 생각하는 분도 많을지도 모릅니다.>-홍마향 오마케 중-
ZUN은 게임이란 단순히 주어진 상황을 해결하는 계획적인 선택과 문제해결이 아닌 캐릭터, 서사, 설정, 디자인, 일러스트, 음악 등이 종합적으로 수용되는 하나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제가 기억하기론 슈팅 게임은 어떤 것이든 어딘가 매력적인 부분이 있고 그 매력을 끌어내기 위한 노력에 가장 많은 힘을 쏟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매력적이었던 무렵의 슈팅 게임을 떠올리며 그 오래된 방법론으로 동방을 만들어 본 겁니다. '탄막'을 매력적이게 만들기 위해 탄막을 스펠카드라는 이름으로 '패키지화'하고, '이름'을 붙여 '모양'에 의미를 부여하고, '캐릭터와 능력'으로 게임과의 괴리를 없애고, '일러스트와 회화'로 탄막에 스토리성과 위압감을 갖게 하고, '음악'으로 캐릭터와 탄막을 게임과 어울리게 한다. 이 모든 것들에 의해 처음으로 완전한 탄막(스펠카드)이 됩니다. 모든 것이 탄막의 매력을 위한 것이고 그 매력이 이 게임의 매력인 겁니다.
제가 앞에 서술했듯이 '데모는 게임이 아니고 연출이나 그래픽은 덤, 게임성으로 승부해야 진짜 게임이다' 같은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었더라면, 탄막은 그저 점수를 벌기 위한 아이템, 혹은 그저 상쾌함을 느끼기 위한 스트레스 해소제, 잘 만들었다고 해도 퍼즐로밖에 성장할 수 없었겠죠. 지금의 슈팅게임은 어떠냐면, 분명 이런 종류의 게임이 늘었고 그건 그거대로 잘 된 일이고 평가하는 사람도 게임과 게임이 아닌 것을 분리해서 평가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니 그런 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지금의 상식일지도 모릅니다.
순수하고 정제된 게임성이 밑바닥에 있고 그 위에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한 그래픽이나 연출이나 설정을 넣는 것이 지금의 방법론이라고 한다면, 게임 안에 존재하는 것은 전부 게임이고 게임성이나 그래픽, 시스템, 설정 등 모든 것을 '가장 보여주고 싶은 것으로 매혹하기 위한 재료'로 삼는 방식은 오래된 방법론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방이 제가 생각하는 오래된 방법론으로 적은 사람에게나마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저에게 큰 의미가 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동인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컨셉을 잡을 수 있는 '21세기의 20세기 연장형 슈팅 게임', 게임이란 아직 완전히 상품화되지는 않은 것인가 싶어서요.>-영야초 오마케 중-
어째서 동방프로젝트는 환상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을까? 감히 추측해보자면 ZUN은 잊혀지는 장르의 게임에 더할 세계관으로 똑같이 잊혀지는 환상을 넣어 함께 기념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홍요영 삼부작 시절 환상은 '봉래' 모티프가 강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이 시절의 환상은 보다 기이하고 이상야릇하며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이며 정제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게 환상향에 들어온 인간들 중 대다수는 다시는 바깥으로 돌아가지 못하지만, 운좋게 원래 세계로 돌아간 몇몇 자들은 그동안 행방불명되었던 기간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받을 게 틀림없겠지. 그리고 그들은 제각기 이렇게 말하고, '머리가 이상해졌다'라며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도원향을 보았다」라거나「봉래산에 갔었다」라고. 환상향을 방문한 인간은, 이곳을 전설의 낙원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일단은, 겉보기엔 '무하유의 향(無何有鄕)'<아무것도 없는 이상향>이면서, 모든것이 이곳에서 살아가는 생물을 위해 그 능력을 다하는 문명도 겸하고 있으니까.
그렇다. 이곳은 인간계에 있던 인간이 보기에는 둘도 없는 낙원이었던 것이다. 환상향은, 많은 요괴와 몇 안되는 인간의 낙원이다. 이 낙원은, 인류가 멸망하거나 이곳을 발견할때까지는 언제까지나 낙원인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전부 환상향 안에서만 일어나는 평화롭고 불가사의한 나날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환상향풍토기 중-
강욕이문에서 레이무에 대한 플랑의 일갈에서 그때와 지금의 분위기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흥, 멍청하네. 적은 쓰러뜨려야만 하는 게 당연하잖아. 언제부터 그렇게 겁쟁이가 된 거야. 내가 지내던 곳에 왔던 넌 모든 걸 파괴할 듯한 눈을 하고 있었는데! 그 시절을 떠올려! 적은 섬멸하는 거야!"
또 영야초의 마지막 EX스테이지 후지와라노 모코우의 스펠카드[정직한 자의 죽음]이나 이명' 봉래의 인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ZUN은 원래 영야초로 끝이던 동방프로젝트의 뜻밖의 인기에 시리즈를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어떻게 할까요. 사실 동방 프로젝트는 향후 두 작품에 대한 사양이 완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아예 다른 신작도 만들어보고 싶네요. 새로운 시리즈도 구상만 되어있습니다. (동방이랑 아무런 차이도 없지만;) 뭐, 일단은 좀 더 동방 프로젝트를 만들어 볼까요. (^^;)>-홍마향 오마케 중-
그래서 구문사기를 쓰며 세계관을 재정립하고 직장 타이토를 퇴사한 후 낸 작품이 풍신록이다. 풍신록의 스토리라인은 새로 환상들이한 신사가 신고식을 당한다는 단순한 내용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오늘날의 환상의 원형이 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풍신록은 신앙에 대해 얘기한다. 모리야 신사는 바깥세계에서 버티지 못하고 신앙을 찾아 환상향으로 도피한다. 다르게 말하면 환상향이 있기에 잊혀지는 모리야 신사가 환상들이 해 신앙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풍신록은 환상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연이어 지령전에서는 지저와의 왕래가 자유로워졌고 성련선에서는 명련사의 불교도가 정착했으며 신령묘에서는 몽전대사묘의 도교 세력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시나브로 환상향은 잊혀진 자들의 낙원이 되었다.
6. 환상의 어제
신령묘는 중심 스토리라인인 부활처럼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었다. 다음 구문구수에서는 그간 늘어난 환상향의 주민들을 일괄로 정리했다. 이후 환상향은 새로운 입주민을 받기를 멈춘다.
그리고 환상향 안팎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돌렸다. 이후 감주전까지의 플롯은 종교전쟁, 약자의 반란, 달의 도시의 침공처럼 보다 급진적이고 과감한 스토리라인을 가졌다.
감주전은 여러 면에서 영야초의 계승작이라고 볼 수 있다. 봉래의 약을 이은 감주의 약이 나왔고 영원정도 나오고 월인과 달토끼도 나오고 우주를 배경으로 한다. 특히 감주전은 동방프로젝트의 세계관이 확장되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감주전은 월인이 나오는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유례적인 파워인플레가 일어났다. 작중 이변해결사들이 본인 입으로 이번 이변은 이례적인 난이도라고 불평할 정도다. 파워인플레가 작품 내적으로는 동방스럽게 별다른 반향은 없었지만 작품 외적으로는 2차창작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7. 환상의 오늘과 내일
이후 문과진보에서는 다시 한번 더 환상향의 현재를 되짚어보고 헤카티아라는 외부자의 시선에서 환상향을 조명한다.
천공장은 전적으로 오키나를 위해 헌정된 작품이었다. 어째서 이러한 구성을 취했는가 추정해보자면 2가지 이유가 생각난다.
첫번째는 환상의 의미를 다시금 정초하는 목적이다. 두번째는 과거 유카리가 맡았던 흑막의 역할을 계승할 캐릭터를 등장시키기 위함이다. 첫번째가 맞다면 앞으로 환상향 자체가 변화할 날은 요원하다고 할 수 있겠다. 두번째가 맞다면 앞으로의 서사에 있어 오키나가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이미 비봉 나이트메어 다이어리, 그리모어 오브 우사미, 강욕이문에서 그런 역할을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