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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hou Project 백업/설정 탐구

취접화 네타로 영나암 읽기

루뇨 리버 2024. 3. 13. 07:53
 

 동방영나암은 네타적인 의미를 제외하면 동방 서적중 최대의 화제작이자 문제작으로 꼽힌다. 초기에 수려한 작화와 이전 서적들에선 볼 수 없었던 미스테리어스한 환상향의 매력을 담은 이야기로 인기를 모았고, 레이무가 여러 요괴를 가차없이 퇴치하는 장면에서 큰 화제를 불러모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한 결말로 인해 (동방 서적들이 으레 그런 평을 받긴 하지만) 비판을 받아 문제작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이런 여러 측면 때문에 여러 독자들이 이미 다른 서적에 비해서도 많은 논쟁과 분석을 했으며 영나암 이전에 비해 조금 더 환상향의 모순에 대한 심도 깊은 2차 창작물 또한 많은 꽃을 피우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인간과 요괴가 스스럼 없이 어울리는 평화로운 환상향의 이야기가 정규작의 주된 플롯이었지만, 영나암의 등장으로 과도한 동인 설정 없이도 시리어스한 주제로 환상향을 그릴 명분이 생긴것이다.

 

그 중에서도 독자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25화는 영나암 하면 떠오르는 대표가 되었으며, 이 한편의 내용으로 파생된 2차 창작만 해도 세자리수는 가뿐히 넘길 것이다. 인간이 요괴가 되는것이 대죄라는 것, 그런 인간이었던 요괴를 가차없이 퇴치해버리는 레이무의 모습,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몇몇 인간들을 감시한다는 언급까지. 동방프로젝트에 몸담고 있는 모든 독자들을 경악시킬만한 내용이었으며 그 전에 말로는 종종 나오던 '요괴는 인간을 덮치고, 인간은 요괴를 퇴치한다.'는 환상향의 대명제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위의 장면은 영나암의 이후 스토리를 암시하는 듯 하며, '요괴들이 지배하는 환상향과 인간들을 감시하는 요괴앞잡이 레이무'등의 네타의 시발점이 되었다. 레이무와 코스즈의 관계는 이전까지는 보호/피보호의 관계로 보였다면 이 화 이후에는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읽히게 되었으며, 코스즈가 일으킨 소동들은 단순한 철없는 코스즈의 일탈에서 위험천만한 악행으로 보이게 되었다. 코스즈가 작중 밝힌 '저쪽(이변해결자)으로 가고 싶다'는 소망은 비극에서 종종 나오곤 하는 바라지 말아야 하는 소망으로 읽혔으며, 종반부에 요마서에 삼켜진 코스즈의 모습은 끝내 타락해버린 악역의 모습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코스즈가 아무렇지 않게 살아남아 일상으로 돌아가는 전형적인 연회엔딩'은 이런 시각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말 뜻밖에도, 동방취접화에 아야가 레이무를 '우파'라고 비꼬는 장면의 등장으로 새로운 해석의 계기가 열린 듯하다. 이 장면에서 아야는 요괴를 퇴치하려고 하지만 직접 적극적으로 미요이를 퇴치하는 대신 붕붕마루 신문을 이용해 소극적으로 대처하려는 레이무를, 우파라는 뜻과 술을 못마시는 사람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진 우당(右党)이라는 단어로 비꼰다. 그렇다면 이 구도에서 아야는 반대로 좌당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영나암에서 아야의 명함에 적혀 있던 '사회파 르포라이터'의 단어선택에서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며, 실질적으로 환상향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다는 레이무와 사이가 나쁜 아야에게 걸맞은 역할로 보인다. 어찌됐건 간에, 아주 뜬금없는 장면은 아닌 셈이다.

 

또한 아야는 영나암에서도 나름의 큰 지분을 차지했으며, 여기서도 레이무와 대립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붕붕마루 신문을 마을에 유통시킴으로써 마을 내 영향을을 끼치려고 하고, 신문을 잘못 읽어 섣부른 판단을 한 레이무에게 면박을 주기도 하며, 코스즈의 실종으로 찾아온 레이무를 말로 물리치기도 했다. 이렇듯 레이무-아야의 관계는 끊임없는 충돌로 이루어져있으며 이는 이 충돌을 단순한 성격차이가 아닌 둘 사이의 입장차에 의한 것, 이를테면 좌파와 우파와의 싸움,으로 볼 충분한 근거로 생각된다. 

 

틀려! 요괴는 인간을 덮치고, 인간은 요괴를 두려워한다. 그게 설사 연기라고 해도 그것이야 말로 요괴의 본분이야!동방자가선 9화, 레이무가
(...)우리 텐구는 인간을 하나의 종족으로 보고 있지 않아요. 마을에 사는 인간과 떨어진 곳에 사는 인간, 산 속에 들어오는 인간, 바깥 세계의 인간... 전부 각각 다른 감정을 가지고 각각 다른 관계성을 지닙니다.(...) 인간처럼 한 개인을 적, 아군이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아요.동방영나암 49화, 아야가
...요괴도, 인간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적은 아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같은 화에서, 코스즈가
그렇기에 레이무와 아야의 생각 차이, 다른 말로는 환상향의 우파와 좌파의 생각 차이, 로 영나암을 읽는다면 이 대립이 꽤 흥미로워 보인다. 레이무와 아큐는 언제나 코스즈에게 요괴를 조심하고, 인간이 요괴쪽 편을 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언제나 신신당부한다. 

이 두사람은 코스즈를 위험인물로 취급하며, 이는 코스즈가 가치관의 혼란이 생기는 후반부에 이르러선 코스즈에게 큰 압박으로 다가온다. 그녀들의 생각은 영나암 25화 등에서 실제 요괴에 위협받는 사람들을 그려 인간과 요괴는 근본적으로 적이라는 생각에 근거를 제공하고, 이 때문에 그녀들은 요괴에 맞설 힘이 없는 코스즈를 진실을 숨기면서까지 보호하려 한다.

 

하지만 이변해결자인 레이무와 마리사가 코스즈의 곁에서 활동하면서 요괴의 다른 면모를 보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두사람이야 말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요괴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코스즈는 무조건 요괴를 퇴치하지 않는 레이무의 의외의 면모를 보게 되고, 마리사의 좌충우돌에 엮이면서 자신은 갈 수 없는 환상향의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되며, 마미조와 아야 등 인간 마을에 섞여들어 적이라고 단정지었던 요괴들의 다른 면모를 보게 된다. 인간인 줄 알았던 마미조가 너구리 요괴라는 사실을 들은 코스즈는 요괴와 인간에 관계에 대해서 혼란스러워하다가 유카리의 개입으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고, 결말에서 자기 나름대로 요마서를 대여할 존재, 요괴들을 자기 눈으로 판단하기로 한다. 영나암의 주제는 결국 위에 두 생각 간의 충돌이며, 코스즈 스스로의 결론으로 이야기가 막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인간과 요괴간의 관계에 견고한 벽을 치는 레이무와 아큐, 그들과 어울리며 한발짝 무른 태도를 가지는 마리사와 코스즈, 위에서 나온 25화의 저 구도는 이런 사고방식의 차이로 해석할 수 있으며 영나암의 결말은 이 둘을 중재한 야쿠모 유카리가 경계의 요괴 답게 중재를 하며 끝났으며, 유카리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역할은 필자도 불만족스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위의 주제는 마을에 숨어사는 요괴 미요이의 일대기를 그린 동방취접화에서 이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그런 맥락에서 취접화를 즐기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 될듯 싶다. 실제 정치적인 네타가 된다면, 그런 골치아픈 주제는 신주가 다루지 않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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